[인물] 유교적 개혁정치, 조광조
조광조(1482년~1519년)는 조선 전기 중종 때 문신으로, 유교적 개혁 정치를 실천하다 처형당했습니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고, 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였는데 연산군의 무오사화 당시 유배 중이었습니다. 용감하게도 조광조는 유배 중인 김굉필을 찾아가서 사사[스승으로 삼아 가르침을 받음]받았습니다.
조광조(趙光祖)의 자는 효직(孝直)이고, 스스로 호를 정암(靜菴)이라 하였습니다. 그는 김굉필의 제자로서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이었으며,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 때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현할 적임자로 사림 세력에 의해 추대되었습니다. 중종 10년(1515) 과거 급제 이후 중종에 의해 개혁 정치 추진의 중심인물로 발탁되었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승진을 거듭하면서 개혁 정책의 추진을 주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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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정치를 펼친 조광조 |
하지만 사림 세력의 급진적인 개혁 추진은 국왕과 공신 세력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는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조선의 정치는 몇 차례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결국 사림 세력이 주도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조광조는 성리학적 이념에 충실한 개혁정치가이자 조선 도학의 정통으로 추숭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인종 원년(1545)에 관작(官爵)이 회복되었습니다.
중종의 눈에 들다
조광조는 과거에 합격한 후 조정에 들어가자마자 여론을 주도하면서 중종의 눈에 들었습니다. 학문적 탁월함, 정치적 이상의 선명성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표현하며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정치력까지 지녔습니다. 당시 중종은 연산군이 쫓겨난 후 사실상 반강제로 국왕이 됐기 때문에 여러 공신 세력에게 위축된 상황이었습니다.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를 적극 등용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조광조 역시 중종을 통해 유교적 이상 사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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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묘소 |
조광조가 꿈꾸었던 개혁정치
조광조의 노력을 보통 '도학 정치'라고 부르는데, 매우 적극적이며 포괄적인 개혁안들을 제시하였습니다. 조광조는 소격서의 폐지와 현량과와 향약의 실시를 주장했습니다. 소격서는 도교 제사 기관으로서, 조선은 유교 국가였음에도 소격제가 유지되고 있었고 특히 왕실 여성들이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결국 조광조의 주장은 받아 들여졌으나 이를 통해 왕실과 조광조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현량과는 천거제를 말하는데 지방의 뛰어난 사람들을 과거시험 없이 단숨에 등용하자는 주장입니다. 이를 통해 여러 인재가 조정에 들어와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향약은 향촌 자치 규약으로, 조광조는 중국 향약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여씨향약을 수입하여 마을 단위로 유교 공동체를 건설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사림파의 세력을 강화하고 유교적인 이상 정치를 심화시키자는 데 중종도 공감했기 때문에 이를 수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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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를 모신 심곡서원(경기 용인) |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중종과 조광조, 중종과 사림파 간의 갈등이 심각해졌습니다. 애초에 중종은 그다지 적극적인 개혁 의지가 없었고 조광조와 사림파는 적당한 유교 정치가 아닌 좀 더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변혁까지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서얼에 대한 차별 정책을 폐지하고, 왕실의 이자 놀이를 금하고, 지주의 횡포를 막으며, 잘못된 조세 제도를 개선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안들이 이들에 의해 주장되었습니다.
기묘사화와 조광조의 죽음
그리고 위훈 삭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조광조 등은 중종반정 당시 책봉된 공신 117명 중 자격이 없다고 평가된 정국공신 76명의 이름을 빼고 토지와 노비를 환수하자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중종은 입장을 180도로 선회하였고, 조광조 일파를 숙청하게 됩니다. 결국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약 5년 만에 멈추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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