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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조계종의 창시자, 지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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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고승 지눌: 조계종의 창시자이자 불교 개혁가  지눌(知訥, 1158~1210)은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고승이자 한국 불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개혁가입니다. 그는 ‘수선사(修禪社) 결사 운동’을 통해 불교의 본질을 되찾고자 했으며 나아가 오늘날 한국 불교의 근간이 되는 조계종의 뿌리를 세운 인물입니다. 보조국사, 지눌 고려 불교의 상황과 개혁의 필요성  고려 시대 불교는 크게 교종과 선종이라는 두 흐름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교종은 경전을 탐독하고 교리 연구를 중시했으며 선종은 화두 참선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길을 중시했습니다.  고려 전기에는 두 흐름의 통합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의천(義天, 1055~1101)은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주장하며, 교학과 선 수행을 아울러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천태종을 창시하고 불교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왕족이라는 신분적 배경 때문에 그의 통합은 권력에 기대어 이루어진 측면이 강했고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개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고려 중기에 들어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사회적 혼란이 심화되자 불교 역시 형식화·타락의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눌은 불교의 본래 정신을 회복하고자 하는 ‘자발적 개혁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수선사 결사와 정혜쌍수  지눌은 전남 순천 송광사의 전신인 수선사를 중심으로 결사(結社)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결사는 뜻을 같이하는 승려들이 모여 함께 수행하고 청정한 불교를 실천하려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는 수행 방법으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강조했습니다. 이는 선정(禪定: 마음을 고요히 하는 수행)과 지혜(智慧: 경전과 이치에 대한 깨달음)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선종과 교종의 장점을 아울러 실천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는 앞선 의천의 교관겸수와 같은 맥락을 이어가면서도 보다 수행자 개인의 실천에 중점을 둔 개혁이었습니다. 돈오점수의 사상  지눌의 또 다른 핵심 사상은 ...

[인물]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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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고승 원효: 불교 대중화의 길을 연 사상가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 617~686)는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독자적인 사상과 수행을 통해 불교의 이론적 토대를 세웠을 뿐 아니라 귀족 중심이던 신라 불교를 민중에게까지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원효 이전의 신라 불교는 왕권 강화와 귀족의 후원 아래 성장한 ‘귀족 불교’, ‘호국 불교’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원광(圓光)이 제정한 세속오계(世俗五戒) ― ‘살생유택(살생은 가려서 할 것)’, ‘임전무퇴(전쟁터에서 물러서지 말라)’ ― 등은 당시 불교가 국가적 이념으로 이용되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는 본래의 자비와 평등을 중시하는 불교 정신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원효대사 해골물의 깨달음과 유학 포기  원효는 학문과 수행에 몰두하던 중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날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도중에 겪은 ‘해골물 일화’는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어느 날 밤, 무덤 속에서 갈증을 느껴 물을 마셨는데 날이 밝고 보니 그것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습니다. 끔찍하게 느껴졌으나 이미 마실 때는 맑고 시원한 감로수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 경험을 통해 원효는 “진리는 바깥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있다”라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당나라 행을 포기하고 신라 땅에서 불법을 전하며 대중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원효의 사상: 일심(一心)과 화쟁(和諍)  원효는 다양한 불교 학파가 대립하던 시대에 ‘일심사상(一心思想)’과 ‘화쟁사상(和諍思想)’을 제시했습니다. 당시 불교는 중관학(空의 철학)과 유식학(唯識의 철학)으로 나뉘어 서로의 주장을 극렬히 비판했는데, 원효는 “모든 학설은 다만 하나의 진리를 설명하는 서로 다른 길일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의 화쟁사상은 “산은 하나이지만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즉, 진리를 향한 길은 달라도 궁극적 진...

[인물] 김춘추, 태종무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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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무열왕 김춘추(太宗武烈王, ?~661)는 신라 제29대 국왕으로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자 통일 신라 시대를 연 주역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단순히 한 왕이 아니라 탁월한 외교가이자 정치 전략가로서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신라의 생존과 번영을 이끌어냈습니다. 왕위에 이르기까지의 험난한 길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로 태어나 왕족 출신이자 최고 귀족 가문인 진골 귀족이었음에도 젊은 시절에는 정치 전면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642년, 백제 의자왕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그의 사위 김품석과 딸을 처형하는 사건은 그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이때부터 김춘추는 ‘반드시 백제를 멸망시킨다’는 집념으로 정치·외교 무대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 치열한 외교 전선과 나당 동맹  백제에 대한 복수를 위해 김춘추는 먼저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신라 북부의 영토를 반환하라는 요구를 내세워 협상이 결렬되었고 김춘추는 억류까지 당하는 위기를 겪었습니다. 가까스로 탈출한 그는 다시 일본에 원군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오랜 동맹국인 백제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는 중국 당나라로 향했습니다. 여러 차례의 실패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 신중하고 집요한 설득을 이어간 끝에 당 태종 이세민과의 협상에 성공합니다. 결국 신라와 당의 연합, 즉 나당 동맹이 체결되면서 삼국의 세력 균형은 결정적으로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김유신과의 협력  김춘추의 정치적 기반에는 김유신과의 굳건한 협력이 있었습니다. 가야계 진골이었던 김유신은 출신 배경으로 인해 한계를 느끼고 있었는데 왕위 계승권에서 불리했던 김춘추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습니다. 대야성 패배와 외교 실패는 두 사람을 더욱 단단히 묶었고 이후 김유신은 신라 군사력의 핵심으로서 김춘추의 꿈을 실현하는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무열왕릉비 왕위에 오르고 백제를 무너뜨리다  내부적으로도 김춘추는 뛰어난 정치 감각을 발휘했습니다. 선덕여왕과...

[인물]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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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正祖, 1752~1800)는 조선의 제22대 국왕으로 1776년부터 1800년까지 24년간 재위하며 조선 후기의 가장 빛나는 개혁 군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할아버지 영조와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 운명을 어린 나이에 직접 목격하며 성장했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인해 정조는 늘 정치적 위협 속에서 살아야 했으나 영조의 신임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지지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정조 학문과 무예에 힘쓴 군주  정조는 어려서부터 독서와 활쏘기를 즐겼습니다. 그는 서책을 무척 사랑하여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마다 귀중한 책들을 대량으로 들여오도록 했습니다.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은 단순한 개인적 취미를 넘어 국가 정책 전반에 반영되었습니다. 독서와 학문을 통해 나라를 개혁할 인재를 길러내려는 의지가 강했던 것입니다. 인재 양성과 개혁의 중심, 규장각과 초계문신  정조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규장각과 초계문신 제도를 통한 인재 양성입니다. * 초계문신 제도는 젊은 관료들을 뽑아 다시 교육하는 프로그램으로 신진 인재를 발굴하여 국가의 개혁 동력으로 삼으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 규장각은 원래 왕실 도서관이었으나 정조는 이를 학문과 정책의 중심지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규장각을 통해 학자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사상과 정책을 논의했고 서얼 출신인 박제가·이덕무·유득공 등을 검서관으로 발탁해 사회적 차별을 일부 완화했습니다. 이는 당시 신분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 사회에서 파격적인 시도로 개혁 군주로서 정조의 면모를 잘 보여줍니다. 규장각 정치 개혁과 중앙집권 강화  정조는 왕권 강화를 통해 국가 운영을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그는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했으며 지방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여 중앙의 통제력을 높였습니다. 또한 수원에 화성(華城)을 건설한 것은 정조의 업적 중 가장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화성 건설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擧重機) 같은 과학적 장치가 활용되...

[인물] 탕평책을 추진한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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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英祖, 1694~1776)는 조선의 제21대 국왕으로 1724년부터 52년간 장기간 재위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회를 깊게 변화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당파 간의 갈등이 극심했던 시대에 즉위하여 탕평책을 추진하면서 분열된 조정을 안정시키고 공존의 정치를 꾀했습니다. 또한 영조는 조선 왕들 가운데 드물게 젊은 시절과 노년기의 초상이 모두 남아 있어 그의 생애와 이미지를 후대가 입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왕이기도 합니다. 영조 철저한 금주주의자  영조는 술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그는 술을 “맑은 기질을 혼탁하게 만들고, 착한 본성을 악하게 만드는 광약”이라 비판하며 철저한 금주령을 시행했습니다. 제사상에조차 술 대신 식혜나 다른 대체 음료를 올리도록 했고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할 정도로 엄격했습니다. 물론 조선 시대에 금주령은 종종 내려졌지만 대부분 농사철의 노동력 보존을 위한 일시적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영조는 왕으로서의 신념과 도덕적 의지로 꾸준히 이를 실천했다는 점에서 독보적입니다. 검소함과 절제의 군주  영조는 생활 태도에서도 철저히 검소함을 유지했습니다. 정조가 기록한 <영조행록>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비단옷을 멀리하고 명주 바지도 입지 않았으며 옷은 여러 번 빨아 입어 솜이 삐져나오는 경우도 흔했다고 합니다. 식사 역시 늘 몇 가지 반찬에 불과했고 상 위에 음식 가짓수가 늘어나면 오히려 거절했습니다.  이러한 검소함은 왕실뿐 아니라 사대부 사회 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조는 수입 사치품을 비판하며 국산품 사용을 장려했고 특히 여성들의 머리에 얹는 화려한 가채 문화도 사치의 상징으로 여겨 이를 억제했습니다. 그의 노력은 사회 전반에 검소한 풍조를 퍼뜨리려는 의지를 반영한 것입니다. 영조의 원릉 정치와 제도 개혁  영조는 정치적 안정뿐 아니라 제도 개혁에도 힘썼습니다. 그는 <속대전>을 편찬하여 법과 제도를 정비했으며 억울한 판결을 줄이기 위해 삼심제를 엄격히 시행하고 가혹...

[인물] 카이사르 암살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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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투스: 로마 공화국의 수호자이자 배신자의 상징  고대 로마의 원로원이었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 기원전 85년경~42년)는 로마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바로 로마의 독재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주동자였습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이른바 ‘3월의 이드(Ides of March)’에 브루투스를 비롯한 공모자들은 원로원 계단에서 카이사르를 둘러싸고 칼을 휘둘렀습니다. 이 사건은 고대 로마사에서 가장 유명한 살인 사건일 뿐 아니라, 정치적 배신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카이사르는 마지막 순간, 자신이 가장 신뢰했던 제자와도 같은 브루투스를 발견하고 라틴어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전해집니다. “에 투, 브루트?(Et tu, Brute?)” - “브루투스, 너마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로마 공화국의 이상과 배신의 아이러니  브루투스는 로마의 고위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정치적 이상과 철학적 교양을 배웠습니다. 그는 특히 로마 공화국의 전통과 자유를 무엇보다 중시했습니다.  기원전 49년 내전 당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반대하며 공화정의 수호자로 나섰습니다. 그러나 승리한 카이사르는 그를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관용을 베풀고 지방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이 은혜는 브루투스를 카이사르의 측근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를 배신자로 만드는 아이러니한 운명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브루투스와 아내 포르키아를 비롯한 공모자들은 카이사르의 독재가 로마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카이사르 암살은 단순한 권력투쟁이 아니라 500년 동안 이어진 공화국을 지켜내기 위한 ‘의로운 살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상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불과 20년도 채 되지 않아 로마는 제정으로 전환되었고 공화정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카이사르 이후 - 브루투스의 몰락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그의 양자이자 ...

[인물] 로마의 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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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의 몰락과 제국의 서막  로마 장군이자 정치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기원전 100년~44년)는 고대 로마뿐 아니라 서양 역사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그는 갈리아 전역을 정복하여 로마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고 원로원의 권위를 무너뜨리며 로마 제국 탄생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종신 독재관에 선포된 직후, 원로원 계단에서 암살당하며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의 죽음은 공화정의 마지막 숨결이자 제정 로마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귀족 가문에서 군인으로  카이사르는 로마의 명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자신들이 사랑과 출산의 여신 비너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신성성을 강조했습니다. 청소년기에 군대에 입대한 그는 일찍부터 정치와 군사 양면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기원전 69년, 그는 오늘날 스페인 지역에 해당하는 로마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기원전 63년에는 로마 종교 최고직인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로 선출되었습니다. 불과 6년 후인 기원전 59년에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더불어 제1차 삼두정치를 수립하여 사실상 로마를 공동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루비콘 강을 건너다 - 내전의 시작  카이사르의 권력은 점차 커졌고 원로원은 이를 경계했습니다. 기원전 50년, 원로원은 그의 군대를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카이사르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는 기원전 49년 1월,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넜습니다. 이때 그는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이 사건은 곧 내전으로 이어졌고 카이사르는 빠르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불과 1년 만에 로마의 절대적 권력자로 떠오른 그는 이후 원로원으로부터 연이어 독재관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44년, 그는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o)으로 선포되며 사실상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