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카이사르 암살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브루투스: 로마 공화국의 수호자이자 배신자의 상징
고대 로마의 원로원이었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 기원전 85년경~42년)는 로마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바로 로마의 독재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주동자였습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이른바 ‘3월의 이드(Ides of March)’에 브루투스를 비롯한 공모자들은 원로원 계단에서 카이사르를 둘러싸고 칼을 휘둘렀습니다. 이 사건은 고대 로마사에서 가장 유명한 살인 사건일 뿐 아니라, 정치적 배신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카이사르는 마지막 순간, 자신이 가장 신뢰했던 제자와도 같은 브루투스를 발견하고 라틴어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전해집니다.
“에 투, 브루트?(Et tu, Brute?)”
- “브루투스, 너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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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
로마 공화국의 이상과 배신의 아이러니
브루투스는 로마의 고위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정치적 이상과 철학적 교양을 배웠습니다. 그는 특히 로마 공화국의 전통과 자유를 무엇보다 중시했습니다.
기원전 49년 내전 당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반대하며 공화정의 수호자로 나섰습니다. 그러나 승리한 카이사르는 그를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관용을 베풀고 지방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이 은혜는 브루투스를 카이사르의 측근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를 배신자로 만드는 아이러니한 운명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브루투스와 아내 포르키아를 비롯한 공모자들은 카이사르의 독재가 로마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카이사르 암살은 단순한 권력투쟁이 아니라 500년 동안 이어진 공화국을 지켜내기 위한 ‘의로운 살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상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불과 20년도 채 되지 않아 로마는 제정으로 전환되었고 공화정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카이사르 이후 - 브루투스의 몰락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그의 양자이자 후계자였던 옥타비아누스(후일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권력을 이어받았습니다. 브루투스는 암살 공모자들과 함께 로마에서 도망쳤지만 공화정의 재건을 외치며 세력을 규합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와 그의 동맹자들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연합군에 패배했습니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던 브루투스는 스스로 검에 몸을 던져 자결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곧 로마 공화국의 이상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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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투스 두상 |
셰익스피어와 후대의 브루투스
브루투스의 이미지는 후대 문학과 예술에서 다양한 해석을 거쳤습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 그는 갈등하는 인간으로 그려집니다. 셰익스피어는 브루투스를 단순한 배신자가 아니라 카이사르를 인간적으로는 존경했지만 로마 시민으로서의 의무 때문에 칼을 들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또한 브루투스의 사생활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그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카이사르의 오랜 연인이었으며 어떤 전승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의 생부였다는 추측도 존재합니다. 만약 이 설이 사실이라면, 브루투스의 칼끝은 단순한 정치적 배신이 아니라 피의 반역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브루투스의 유산
브루투스는 영웅인가요, 배신자인가요? 그의 행동은 로마 공화국을 지키려는 이상에서 비롯되었지만, 결과적으로 공화정을 구하지 못했고 오히려 제정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투스는 오늘날까지도 ‘공화정의 수호자’이자 ‘비극적 배신자’라는 이중적 이미지를 동시에 지닌 인물로 기억됩니다. 그의 이름은 권력과 이상, 충성심과 배신 사이에서 인간이 겪는 영원한 갈등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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