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고려의 태조, 왕건

고려 태조(王建, 877–943)


고려의 초대 임금, 태조 왕건은 877년 음력 1월 14일(양력 2월 4일) 송악(지금의 개성)에서 태어났습니다. 발해계 호족의 외가와 고구려 계통의 가문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인망이 두터웠으며 풍수지리 전문가 도선(道詵)의 예언에 따라 태어난 인물로 전해집니다.

왕건 표준영정
왕건 표준영정


궁예 휘하에서의 성장


896년 송악의 호족 왕륭과 왕건은 궁예에게 귀부했고, 왕건은 장군으로 활약하며 충주·청주·상주를 비롯해 육지와 해상을 오가며 후백제의 거점 나주를 여러 차례 공략했습니다. 해상전에서 화공 전략으로 승리를 거두며 도서 지대에도 영향력을 뻗혔고, 913년에는 시중(侍中)이 되어 정치∙군사적 2인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권력 장악과 건국


918년 궁예의 폭정을 이유로 신숭겸 등 무장과 귀족의 지지를 받은 왕건은 철원에서 반란을 일으켜 궁예를 축출하였습니다. 7월 30일 고려를 세운 뒤 수도를 송악으로 옮겼습니다. 호족 통합을 위해 정략결혼, 자제 유학, 식읍과 사심관 제도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공산전투에서 왕건과 신숭겸
공산전투에서 왕건과 신숭겸


후삼국 통일 전쟁


왕건은 신라와 우호관계를 구축해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자 지원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927년 공산 동수 전투에서는 패하고, 신숭겸 등이 전사하였습니다. 이후 930년 고창 병산 전투에서 유금필 등의 활약으로 후백제를 크게 격파하며 주도권을 회복하게 됩니다. 935년 견훤이 고려에 투항하고, 신라 경순왕도 사위로 맞이하며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통치 정책


* 호족 융합 : 각지 유력 가문과의 결혼 정책, 자제 도성 유학 수용, 사병 통제 등으로 권력 기반을 강화하였습니다.

* 북진 정책 : 전진 기지인 서경 개척, 발해 유민 수용, 여진족·거란 견제 외교를 적극 추진하였습니다.

* 숭불정책 : 왕사 임명(충담), 무차대회 개최, 사원 중수·건립 등을 통해 불교를 국가 기반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외교와 말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왕건은 강경 대응으로 사신을 추방하고, 거란과 단교하였습니다. 이후 중국 오대십국·여진과 균형 있는 외교를 펼쳤습니다. 말년에는 나라의 지침으로서 ‘훈요십조’를 박술희에게 유훈으로 남겼습니다.

개성에 있는 태조 왕릉


최후와 평가


943년 음력 5월 29일(양력 7월 9일) “인생은 덧없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67세. 재위 기간 민생 안정, 중앙집권 및 통합정책에 성공했지만, 후계 문제를 충분히 정비하지 못해 이후 혜종·정종·광종 시절 혼란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존재합니다.


결론


왕건은 혼란의 후삼국 통합을 거쳐 고려를 건국하고, 호족 통합·북진·숭불 정책을 바탕으로 한반도를 재통일하였습니다. 그러나 권력 승계 체계는 완성하지 못해 사후 고려 초기 정치의 혼란을 일부 유발했다는 점도 있어서 다양한 역사적 평가가 존재합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