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

 궁예(弓裔, 869년? ~ 918년)는 신라 시대 왕가 진골귀족 출신의 승려이자 태봉[후고구려에서 마진, 태봉으로 국호가 바뀜]의 군주입니다. 그는 신라 헌안왕 또는 경문왕과 후궁 사이에 태어난 서자였습니다. 속세에서의 성은 김(金)씨, 본관은 경주(慶州),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선종(善宗)입니다. 918년 왕건에게 축출되었습니다.

 신라 왕실의 서자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유모가 피신시켜 죽음을 모면했고 이후 세달사로 피신하여 승려가 되었습니다.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자립하여 사병을 모으고 장군이 되었다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했습니다. 뒤에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변경했으나 스스로를 미륵으로 자처하면서 신정적 전제 왕권을 강력히 추진하였습니다.

 이후 호족들과 태봉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군인, 불교 세력 및 유학자들과 갈등하던 중 918년 시중 왕건과 그를 추대한 군인, 왕건을 강력히 지지한 옛 고구려계의 패서 지역 호족들과 왕건을 지지한 유학자들에게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궁예 표준영정
궁예 표준영정


후고구려를 건국하다


 후삼국 시대에 후고구려를 건국한 왕. 정확한 출생 경위는 모르지만 신라 진골귀족의 후예라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신라 말기 진성여왕 때가 되면 지방 반란이 본격화됩니다. 죽주의 기획, 북원의 양길 등이 등장하는데 승려였던 궁예는 이들의 수하에 들어가서 강릉 일대에서 세를 도모하였습니다. 이후 철원, 개성 등으로 영역을 확대했고 결국 양길 세력을 물리친 후 후고구려를 세웠습니다.

 궁예는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자주 바꾼 것으로 유명합니다. 국호를 901년에 후고구려, 904년에는 마진, 911년에는 태봉으로 바꿨고 수도도 송악(오늘날 개성)에서 철원으로 옮겼습니다. 불안정한 정국 운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데 다만 국호의 의미만큼은 곱씹어볼 만합니다. 마진은 대동방국이라는 의미이고, 태봉은 서로 화합하는 세상이라는 의미인데 고구려를 계승하고 백제와 신라를 포괄하는 삼한 통일의 이상을 천명했다는 점에서 선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의 중북부 지역을 장악한 궁예는 자신보다 1년 앞서 후백제를 선포한 견훤과 자웅을 겨룹니다. 특히 왕건을 전라남도 나주와 진도 지역에 파견하여 후백제의 후미를 장악했던 사건은 후삼국 시대 전장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후삼국시대
후삼국시대


미륵신앙으로 통치


 또 자신을 미륵불이라고 칭했는데, 미륵불은 민중을 구원하러 오는 부처를 의미합니다. 고단한 생활을 하던 대부분의 백성이 미륵을 섬겼는데 궁예는 그들의 대변자임을 자처한 것입니다. 하층민에서 국왕 자리에까지 오르면서 민중의 삶을 온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이런 발상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미륵 신앙은 이때 뿐만 아니라 고려, 조선 시대까지 대표적인 민간 신앙으로 유지됐고 특히 난세에는 더욱 숭배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라를 세우는 입지전적인 능력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데는 미숙했던 듯합니다. 두 아들을 보살로 칭하거나 미륵 신앙을 빌미로 숙청을 일삼는 등 궁예는 후기로 갈수록 폭군이 되어 갑니다. 결국 왕건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궁예에 대한 반론


 궁예가 폭군이었기 때문에 쫓겨났다는 주장에 대해 최근 꾸준히 반론이 제기됩니다. 우선 역사는 승자 위주로 기록된다는 점, 남아 있는 역사 자료가 고려 시대의 기억을 배경으로 쓰였다는 점, 또 왕건이 지방 실력자들인 호족과 연대해서 궁예를 몰아낸 점을 고려하면 둘 간의 다툼이 폭정의 문제가 아닌 세력 싸움이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철원 일대의 궁예 관련 민간 설화가 역사 기록과 다르게 긍정적이라는 점도 반론의 근거입니다. 하지만 이를 판단할 수 있는 기록이 매우 적고, 대부분 축출되는 국왕들이 실정을 반복하면서 민심을 잃은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반론을 무작정 옹호할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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