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군주, 세종대왕
세종대왕(1397년-1450년)은 조선을 넘어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 군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함께 한국사에서 '대왕' 칭호를 가진 인물로, 조선이라는 국가의 엄청난 발전을 이끈 임금이자, 한국사에 길이 남을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조선 4대왕으로,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재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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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표준영정 |
세종의 즉위과정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킨 일련의 행동과 사건들로 인해 태종의 마음이 동요하였습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안정과 왕권을 이어받아 훌륭한 정치를 펴기에 양녕대군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태종의 마음이 이미 떠난 것을 알게 된 신하들은 그를 폐위할 것을 청하는 소를 올려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태종에게는 왕후 민씨 소생으로 양녕, 효령, 충녕 등 세 대군이 있었고, 양녕대군에게도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를 폐하고 새로이 세자를 세우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에 세자 폐립에 관해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종의 마음은 이미 셋째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1418년 6월에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라고 하며 세자로 책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처럼 충녕대군에 대한 세자책봉은 태종의 뜻에 따라 극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대부분의 신하들도 이를 환영하였습니다. 두 달 뒤인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선위를 이어받아 세자 충녕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가 바로 세종입니다.
세종의 국가경영
세종은 아버지 태종과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고려의 마지막 충절 정몽주, 조선의 건국자 정도전을 제거했습니다. 또 이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을 도왔던 처남 민무구, 민무질을 비롯한 여러 공신들도 가차 없이 제거하였죠. 큰 아들 양녕대군이 군주의 자질이 없자 셋째 충녕대군을 군주로 세우는 과정에서 외척의 발호를 염려하여 충녕대군의 장인 심온을 죽였습니다. 이에 반해 세종은 인위적인 권력 강화를 시도하기보다 가치와 비전을 설정하고 신하들과 힘써 그 일을 이루면서 리더십을 확보하였습니다. 집권 초기 심온의 억울한 죽음을 재조사해 이에 연루된 아버지의 측근들을 제거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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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
농업의 발전에 힘써
세종은 자기 자신을 '수성의 군주'로 간주하였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룬 나라를 잘 운영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스스로 '공 세우기'를 경계하였습니다. 또 유교 국가의 군주로서 유교적 가치를 성실히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유교적 관점에서 백성은 먹을거리가 풍족해야 윤리적 삶을 살 수 있으며, 농업이 가장 이상적인 노동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에 따라 세종은 <농사직설>의 편찬을 주도하고 각종 천문 기구를 제작해 농업 생산력 향상에 힘썼습니다.
세종의 리더십과 우수한 신하들
이러한 세종의 특별한 리더십 때문에 오늘날에도 수많은 신하가 기억됩니다. 집현전은 과학 기술과 학문 발전의 요람으로 평가받으며, 황희와 맹사성 같은 이들은 명재상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김종서와 최윤덕은 4군 6진을 개척하여 한반도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였고, 정인지, 정초, 이순지 등은 각종 과학 기술에 중요한 성과를 일구어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버지 태종에 의해 불필요한 정쟁의 요소가 제거됐기 때문에 세종이 좋은 조건에서 정력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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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목판본 월인석보 |
한글 창제의 일화
널리 알려진 사실과는 달리 한글 창제를 둘러싼 신하들의 반대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한글이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최만리가 상소를 올린 정도였고, 창제 이후에 실용성과 쓰임새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별 문제없이 민간에 보급되었습니다. 애초에 한자의 대체어가 아닌 보조어나 여성과 백성의 언어로 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문자 사용을 우려한 신하들의 지적이 있었는데 세종은 글을 통해 법을 알고, 이를 통해 자신을 지킬 수 있다면서 문자의 사용을 옹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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