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목민심서의 실학자, 정약용

 정약용(1762년-1836년)은 조선 후기 정조 대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입니다. 2012년,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아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정약용 초상
정약용 초상


정약용의 생애


 그는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및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를 배우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1776년에는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때마침 이 때 부친의 벼슬살이 덕택에 서울에서 살게 되어,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이가환과 학문의 정도가 상당하던 매부 이승훈이 모두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도 이익의 유서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익은 근기학파의 중심적 인물이었습니다.

 정약용이 어린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이론에 접했다고 하는 것은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약용 자신이 훗날 이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단초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약용의 거중기
정약용의 거중기


정약용의 유배생활


 정약용은 정조 집권 시절 정력적으로 개혁 사업을 도왔고, 특히 화성 건설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조 사후 천주교도라는 혐의로 강진에서 무려 18년간 고단한 유배 생활을 보내게 됩니다.

 그의 형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당당하게 고백한 후 참수를 당했고 다른 형인 정약전과 정약용 또한 유배 길에 오른 것입니다. 정약전은 흑산도,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났는데 함께 내려가다 나주 율정에서 헤어졌습니다. 각 유배지에서 큰 학문적 업적을 이뤘으나 형제는 이후 영원히 만나지 못했습니다.

 정약전은 죽기 전까지 동생 정약용과 편지로 교류했고 흑산도 유배지에서 “자산어보”를 남겼습니다. 흑산도 생태를 관찰한 기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 생물학서로 봐도 무방합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
정약용의 목민심서


정약용의 학문적 업적


 정약용의 학문적 업적은 더욱 유명합니다.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포함하여 182책 503권의 <여유당집>을 남겼습니다.

 정약용은 기존의 조선 성리학에 근본적인 이견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학문적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는 태극이나 이치 같은 성리학의 근본 개념을 단지 만물에 깃든 속성일 뿐 실체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창조자와 창조의 속성을 구분하면서 성리학의 이기론을 비판했는데 상당히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약용의 사상


 정약용은 인간의 선천적인 도덕성을 부정하였습니다. 기존의 성리학자들은 사람 안에 '사덕'이 있고 양명학자들도 '양지'가 있다고 했는데 이를 전면 부정한 것입니다.

 정약용은 인간을 '혈기적 존재'로 보았습니다. 인간 안에 단지 '도덕적 욕구'만이 존재한다고 본 것입니다. 선하고자 하는 열망, 악을 미워하는 욕구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욕구'라는 개념은 유학사에서 상당히 독특한 부분입니다. 이전까지 유학자들은 보통 '욕구'를 '사욕'과 거의 동의어로 인식하고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정약용은 '욕구'를 '도덕적 욕구'로 해석했고 긍정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을 인간의 고유성으로 판단했습니다. 정약용은 '자유 의지'를 강조하였습니다. 이는 '자주지권'이나 '권형', '권능' 등의 말로 쓰이는데 도덕적 욕구를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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