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조선의 창업군주, 이성계

 이성계는 1335년(충숙왕 복위4년) 고려 동북면 화령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고려 장수이며 공민왕과 우왕 시대에 홍건적과 왜구 토벌에서 영웅적 공로를 쌓아 입지를 다졌습니다. 1388년(우왕 14년) 철령 이북 영토 문제를 두고 명나라와 갈등이 빚어지자,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우왕은 명나라 요동 정벌을 명하였습니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요동 정벌을 위하여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공양왕에게서 선위 형식으로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함으로써 조선을 개국하였습니다.

태조 이성계
태조 이성계


고려 말기의 명장 이성계


 귀신같은 활솜씨와 지휘력으로 홍건적과 왜구를 연달아 막아내 최영과 함께 구국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고려 말 최대 군벌로서 실력을 갖춘 데다가 신흥 무인세력들과 급진 신진사대부들의 협력과 지지를 받으며 정계의 주요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정적들을 차례로 숙청했으며 마침내 1392년에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하게 됩니다.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을 내세워 새 왕조의 기틀을 다졌으나, 계비인 신덕왕후가 죽자 일어난 1차 왕자의 난으로 둘째 아들 정종에게 전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처가 쪽 생존자였던 조사의를 내세워 1402년 함경도에서 군을 일으켜 권토중래를 노렸지만 태종에게 진압되었습니다. 1408년 승하하여 건원릉에 안장되는 한편 신위는 종묘에 봉안되었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이성계의 생애


 조선의 창업 군주인 이성계는 함경도 출신으로 5천 명의 사병을 거느렸던 지방의 실력자이자 활쏘기가 출중했던 탁월한 무장이었습니다.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은 국가 운영에 근본적인 위험이 되었습니다. 10만 명이 넘는 대규모 부대인 홍건적이 두 차례 침입했는데 한때는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복주(오늘날 안동)로 피난갈 정도의 거대한 위협이었습니다. 왜구는 해안가에서 내륙까지 침탈을 일삼았고 수백 척의 군선을 몰고 와 직접 개경을 공격할 정도였는데 특히 우왕 때는 가공할 기세로 전토를 유린했습니다.

 심각한 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이성계는 최영과 더불어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됩니다. 홍건적에 의해 점령된 수도를 탈환하는 전투, 원나라 장수 나하추와의 전투, 공민왕을 몰아낼 목적으로 원에서 보낸 덕흥군과 1만 군사를 격퇴하는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습니다. 무엇보다 우왕 3년에 경상도와 전라도 내륙까지 쳐들어와 큰 피해를 입힌 왜군을 무찌른 황산대첩의 주역이기도 합니다. 이 밖에 여진족 호바투의 군대를 무찌르는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이성계 동상
이성계 동상


조선의 창업


 같은 시기 공민왕의 개혁이 실패하고 집권 후반기에는 실정을 거듭합니다. 우왕 대에 사회가 더욱 혼란해지면서 최영과 이성계 같은 신흥 무인 세력의 영향력이 강화됐고 결국 정도전 등이 이끄는 신진 사대부와 연합하여 조선 왕조를 창건합니다.

 맹장보다는 덕장으로 불렸는데 국왕이 된 이후에도 이런 모습은 계속되었습니다. 사람을 한번 신뢰하면 든든히 뒷받침을 해주는 리더십으로 혁명파의 많은 인재가 조선 개국 전후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세자 책봉을 둘러싼 갈등과 아들 이방원의 저돌적인 도전에 의해 왕자의 난 이후 권력을 상실하고 쓸쓸한 말년을 보내게 됩니다.

 이성계는 전형적인 아웃사이더였습니다. 고려는 문벌귀족 위주의 철저한 개경 중심 사회였습니다. 이성계가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던 힘은 역설적이게도 고려 말기의 혼란상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최영이 이성계를 든든히 후원했다는 배경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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