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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June, 2025

[인물]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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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의 성녀이자 인도의 사회운동가입니다. 또한 노벨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합니다.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알바니아어로 아녜저 곤제 보야지우(Anjezë Gonxhe Bojaxhiu)입니다.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 1910년~1997년)는 인도 캘커타에서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 헌신하여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종교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 수녀의 길을 가다  알바니아 혈통의 소수 민족 출신인 그녀의 본명은 알바니아어로 '장미 꽃봉오리'를 뜻합니다. 테레사는 열두 살 때 가톨릭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열여덟 살에 아일랜드계 수녀원에 들어갔고 더블린으로 건너가 영어를 배웠습니다. 그 후 캘커타에서 17년간 역사와 지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녀에게 인생의 전환점은 1946년 9월, 기차로 640km를 여행하던 중에 찾아왔습니다. 이 때 예수가 나타나서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고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병들고 궁핍한 자들을 도와주라고 했다고 말합니다. 새롭게 찾은 소명을 수행하기 위해 그녀는 1950년에 교황의 허가를 받아 사랑의선교 수녀회를 설립했습니다. 1957년에 62명뿐이었던 수녀가 1992년에는 4000명에 이를 정도로 이 수녀회는 고속 성장을 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과 마더 테레사 노벨 평화상 수상자  그녀는 1979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으나 낙태와 피임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관점으로 비판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1995년에 이혼을 합법화하는 아일랜드 국민 투표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말년 즈음에 사랑의선교 수녀회의 수수께끼 같은 재정을 자세하게 다룬 기자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1995년도 저서 “자비를 팔다”로 인해 마더 테레사의 명성에 한층 더 의문이 더해졌습니다. 후속 수사 결과 수녀회는 수백만 달러의 기금을 모았음에도 일부 환자에게 피하주사기 바늘을 재사용한 것으로 드러나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

[인물]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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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 및 러시아의 정치인으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6대 서기장,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과 최고회의 주석을 거쳐 소련의 최초이자 마지막 대통령으로 재임했습니다.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최고 권력자로 재임하면서 소련 내 개혁 정책인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동시에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던 미국과 소련 간 냉전을 종식시킨 인물이자 소련 붕괴를 야기한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소련의 지도자 고르바초프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는 빈사상태의 경제, 군국주의 외교 정책 그리고 억압된 시민 사회를 개혁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일으킨 변화는 이 공산주의 초강대국을 당황시켰고, 혼란에 빠진 소비에트 연방은 1991년 크리스마스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습니다.  러시아 남서부에서 태어난 고르바초프는 1952년에 공산당 일원이 되었고 1980년에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들어갔습니다. 1982년, 소비에트 지도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사망이 소비에트 정권에 불안정의 시기를 촉발했고, 그 뒤를 이은 두 명의 서기장이 모두 2년도 채 되지 않아 사망하였습니다. 더 젊은 인물을 찾던 당 지도자들은 1985년에 고르바초프를 선택하였습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  서기장에 오른 고르바초프는 안팎으로 크나큰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소비에트 군대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고, 경제는 난장판이었습니다. 동유럽 사회주의권 국가들 사이에서 점점 더 거세지는 독립운동이 소비에트의 패권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은 소비에트 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더욱 공격적인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개혁)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 개방)라는 두 가지 개혁 정책을...

[인물] 존 레논(John Len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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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레논은 영국의 싱어송 라이터이자 사회운동가입니다. 비틀즈 내에서 보컬리스트, 리듬 기타리스트, 작곡가였습니다. 비틀즈 라고 하면 폴 매카트니와 더불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비틀즈가 해체한 이후로는 영국을 떠나 뉴욕에 정착해 활동했습니다. 1970년대 이후로는 음악 뿐만 아니라 좌익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했습니다. 존 레논 John Lennon 비틀즈와 존 레논  베이비부머 세대의 문화 아이콘인 존 레논(John Lennon, 1940년~1980년)은 비틀즈의 기타리스트이자, 폴 매카트니와 더불어 공동 작곡자로서 20세기에 가장 기억에 남고 영향력 있는 팝송 히트곡을 만들었습니다.  다른 비틀즈 멤버처럼 존 레논도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났습니다. 폴 매카트니와는 1957년에 콘서트장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고전 끝에 음반 계약에 성공한 비틀즈는 1962년에 최초의 히트송 <러브 미 두>를 발표했고, 이 곡은 크게 인기를 얻었습니다. 1964년 초, 뉴욕에 입성한 네 사람은 미국의 여러 음반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했습니다. 존과 폴이 함께 만든 곡 중 많이 알려진 것으로는 <헬프>(1965년), <올 유 니드 이즈 러브> (1967년) 그리고 <컴 투게더>(1969년)가 있습니다. 비틀즈 The Beatles 비틀즈의 해체 이후  비틀즈는 1970년에 개인적, 재정적 분쟁으로 해체했습니다. 레논과 그의 부인 오노 요코는 1971년에 뉴욕으로 이주했고, 레논은 그곳에서 남은 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반전(反戰) 싱글 음반 <기브 피이스 어 챈스>(1969년)와 유토피아적인 찬가 <이매진>(1971년)은 비교적 정치색이 적었던 비틀즈의 노래와는 차이가 있었는데, 두 곡 모두 평화 시위대의 대표곡이 되었습니다. 1980년에 앨범 <더블 판타지>를 발표한 직후, 존 레논은 자신의 아파트 앞길에서 마크 채프먼의 총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사망 당시 그...

나이팅게일만 있었던 게 아니다? 잊혀졌던 진짜 '백의의 천사', 메리 시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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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우리가 잘 몰랐던,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 한 명을 소개하려고 해요. 바로 ‘검은 나이팅게일’이라 불리는 “메리 시콜(Mary Seacole)”입니다.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되며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던 그녀의 삶은, 역사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묻혀 있었습니다. 이제 그녀의 이야기를 함께 들여다보아요. 매리 시콜( Mary Seacole ) 자메이카에서 태어난 생명의 손길 메리 시콜은 1805년 자메이카에서 태어났어요.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게서 약초와 전통 치료법을 배웠습니다. 어머니는 지역 사회에서 병을 치료하던 힐러였고, 메리는 그 모습을 보며 자랐죠. 그녀는 성장 후 군 병원에서 근무하며 의료 지식을 쌓았고, 자연스럽게 사람을 살리는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전쟁터로 향한 간호사의 용기 1854년, 러시아와 영국·프랑스 등 연합국 사이에 크림전쟁이 발발합니다. 영국 정부는 간호사를 모집했고, 메리 시콜도 지원했죠.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모두 “거절”. 흑인이자 식민지 자메이카 출신 여성이라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자신의 돈으로 직접 전쟁터에 가서 치료소를 세우고 부상병들을 돌보았습니다. 후방에서 활동한 나이팅게일과 달리, 메리 시콜은 가장 위험한 최전방에서 병사들과 함께했습니다. 매리 시콜은 전쟁터로 향했다 병사들이 부르던 또 다른 이름, "어머니" 전투 중 부상당한 병사들은 메리 시콜을 ‘어머니’라 불렀습니다. 그녀는 치료뿐만 아니라, 죽음을 앞둔 이들의 마지막까지 곁을 지켰습니다. 단지 의술이 아니라, 마음으로 다가갔기 때문에 병사들이 그녀를 그렇게 부른 것이죠.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병들고 가난한 몸으로 남겨졌지만, 그녀를 기억하는 병사들은 끝까지 그녀를 돕고 그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려 노력했어요. 잊혀진 초상화에서 되살아난 이름 2000년대 초, 런던의 한 액자가게에서 낡은 액자 속에서 한 초상화가...

[단편상식] 지진파의 분류, 특성(P파와 S파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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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지진이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한반도가 지진의 안전 지대가 아니라는 말이 뉴스에서 자주 들려 옵니다. 오늘은 지진파에 대해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학창시절에 배웠던 내용을 떠올리면서 정리해 봅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 지진파의 종류  지진에서 발생하는 지진파는 크게 P파와 S파 2가지로 구분됩니다. 이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전파되고, 지진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과학자들은 ​P파와 S파의 도착 시간 차이를 분석함으로써, 지진의 진원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지진의 규모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두 파동의 특성은 지구의 내부 구조를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P파와 S파 비교 지진파의 특성 P파 (Primary Waves, 압축파 또는 종파)  P파는 지진파 중 가장 빠르게 이동하는 파동으로, 지진 발생 직후 가장 먼저 감지됩니다. 속도는 7~8km/s입니다. 이 파동은 압축파(Compressional wave)로서 음파와 비슷한 방식으로 물질을 압축하고 팽창시키면서 전달됩니다. P파는 매질의 진동방향과 파의 진행방향이 같은 종파이기 때문에 고체, 액체, 가스 등 모든 매질을 통해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진원지를 파악하는데 사용됩니다. S파 (Secondary Waves, 전단파 또는 횡파)  S파는 P파보다 느리게 이동하는 지진파입니다. 속도는 3~4km/s입니다. 전단파(Shear wave)로서 매질 내의 입자를 수직 방향으로 진동시키면서 전달됩니다. 따라서 P파에 비해 속도가 느립니다. 이로 인해 지표면이 위아래로 흔들립니다. S파는 고체를 통해서만 이동할 수 있으며, 액체나 가스를 통과하지 못합니다. S파는 P파에 이어 지진 감지기에 도달하며, 지진의 크기나 파괴력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매질(媒質, transmission medium)이란 어떤 파동 또는 물리적 작용을 한 곳에서 ...

[인물] 체 게바라(Che Guev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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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년 6월 14일 ~ 1967년 10월 9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입니다. 의사로 성장한 그는 쿠바의 게릴라 지도자가 되었고 쿠바 혁명 이후 정치인, 외교관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게릴라 활동에 대한 군사 이론을 만들기도 하였고 여러 저작을 펴낸 저술가이기도 합니다.  볼리비아에서 군사 정권에 대항하는 게릴라 활동 중에 체포되어 사형되었습니다. 대중에게 체 게바라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사후 여러 대중 문화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다루어졌습니다. “체”는 아르헨티나 스페인어에서 “어이” 또는 “이보게”하고 다른 사람을 부를 때 쓰는 말에서 따온 것입니다. 체 게바라 Che Guevara 체 게바라의 등장  남아메리카 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1928년~1967년)는 20세기에 좌익 반란군의 아이콘으로 등장했습니다. 원래 의학 교육을 받은 체 게바라는 쿠바와 콩고 혁명에서 싸웠으며,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반란군을 이끌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정글에서 사망한 후로 체 게바라를 둘러싼 신화가 생겨났으며, 지금까지 남아 있는 많은 라틴아메리카 좌파에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수백 건의 정치적 처형과 인권 남용을 저질렀다고 주장합니다.  아르헨티나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체 게바라는 의과 대학을 다니던 중 오토바이 여행을 하다가 남아메리카 전역에 만연한 가난을 목격하고 정치적인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공산주의를 해결책으로 받아들인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의 초기 지지자로 1956년에 카스트로의 게릴라 반군에 합류했습니다.  카스트로가 마침내 미국을 등에 업은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를 몰아냈을 때 체 게바라는 새로운 혁명 정부에서 선임 지위로 올라가면서 국제적인 위상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1959년에 수백만 명의 정치범을 재판 없이 처형하도록 직접 명령했는데, 이 사건이 그의 죽...

[인물] 폰지 사기의 유래, 찰스 폰지(Charles Pon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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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스 폰지(Charles Ponzi, 1882년~1949년)는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활동한 이탈리아인 사기꾼입니다. 1920년대에 널리 알려졌으며 외국에서 구매한 만국우편연합 국제반신권을 미국에서 내다 팔 때의 차익을 이용해서 투자자들에게 45일 내에 50%의 수익률을 그리고 90일 내에 100%의 수익률을 낼 수 있다고 하며 투자금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신규 투자자들의 투자금을 기존 투자자들에게 지급해주는 사기였습니다. 이 수법을 처음 이용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찰스 폰지의 사례가 가장 유명하기 때문에 ‘폰지 사기(Ponzi scheme)’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러한 기법으로 1년 간 투자자들에게 2천만 불의 손해를 입혔습니다. 찰스 폰지 Charles Ponzi  이탈리아 이민자로 보스턴에 도착했을 때 찰스 폰지(Charles Porzi)는 등에 걸친 셔츠 한 장과 주머니 속 2달러 50센트 밖에 없었습니다. 1500만 달러라는 거금을 모은 폰지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 될 수도 있었으나 그 대신 그의 이름은 오늘날 흔히 '폰지 사기'로 알려진, 4만 명의 보스턴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 정교한 금융 사기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기행각의 시작  1919년에서 1920년 사이, 불과 몇 개월 만에 폰지는 같은 이탈리아 이민자 다수를 비롯해 노동자, 과부, 사제의 노후 대비 자금을 모았습니다. 체포되기 전까지 그는 기적과 같은 두 자릿수 수익률로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폰지는 스페인에서 날아온 국제 반송 쿠폰이 포함된 한 우편물을 받은 후에 이 사기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그 쿠폰은 발송인(스페인 사업체)이 원래의 우편 요금과 동일한 금액을 반송 우편 요금으로 선지불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환율 변동으로 인해 스페인의 우표 요금이 미국의 우표 요금보다 저렴했습니다. 따라서 그 스페인 사업체는 결국 반송 우편에 대해 약간의 할인을 받게 되는 셈이었습니다. 폰지는 그런 쿠폰을 많...

[인물] 미녀 스파이, 마타 하리(Mata H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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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타 하리(Mata Hari, 1876년~1917년)는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활동한 미녀 스파이의 대명사입니다. 그녀는 첩자 혐의로 처형된 네덜란드 출신의 무용가입니다. 본명은 마르하레타 헤이르트라위다 젤러입니다. 마타 하리 Mata Hari 마타하리의 생애  본명이 마르가레타 헤이르트라위다 젤레(Margaretha Geertruida Zelle)인 그녀는 이국적인 댄서이자 창녀이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첩자로 처형된 인물입니다. 그녀의 일생과 간첩 행위에 대한 재판은 매력적인 소재로 끊임없이 활용되어 왔습니다. 마타 하리의 자유로운 성생활로 인해 군사적 차질에 대한 희생양이 필요했던 프랑스에게 불공평하게 표적이 되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네덜란드 시민이었던 젤레는 열여섯 살에 학교 교장과 잠자리를 한 혐의로 퇴학당했습니다. 열여덟 살에 네덜란드군 장교와 결혼한 후에 그를 따라 오늘날의 인도네시아인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로 이주했습니다. 남편은 그녀에게 매독을 감염시켰고 폭력적이었습니다. 댄서로 활동하다  몇년 후 이혼하고 유럽으로 돌아온 젤레는 1903년에 파리로 건너가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고, 인도네시아어로 '여명의 눈동자'라는 뜻의 마타 하리를 이름으로 사용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원주민 춤에서 유래했다는 그녀의 이국적인 옷차림과 관능적인 스트립쇼는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마타 하리는 프랑스 엘리트들을 연인으로 삼기 시작했는데, 그 대상은 저명한 사업가에서부터 군 장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무렵, 마타 하리는 이미 서유럽 전역에서 공연을 하며 유명세를 타던 중이었습니다. 중립적인 네덜란드 시민이었던 그녀는 유럽의 전쟁 국가를 자유롭게 여행하며 프랑스, 독일,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을 방문했습니다. 마타 하리 Mata Hari 이중스파이 활동  그녀가 체포되고 거의 한 세기가 지난 후에도 관련 사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

[인물]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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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는 세르비아계 미국인으로 발명가, 물리학자, 전기공학자입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출신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변압기 및 교류 시스템을 고안하고 상업용 전기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전자기학의 혁명적인 발전을 가능케 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전기공학자 테슬라  젊은 시절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1856년~1943년)는 선구적인 발명과 전기에 관한 연구로 미국 전역에서 명성을 누렸습니다.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나 전기 공학 훈련을 받은 테슬라는 부모가 사망하고 난 후 1884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테슬라는 미국의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 밑에서 일하기 위해 뉴저지주로 갔지만 에디슨이 테슬라에게 약속한 보수를 지불하지 않자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에디슨 회사를 그만둔 뒤로 테슬라는 1886년에 뉴저지주에 자신의 독립적인 연구소인 '테슬라 전기 조명 및 제조 회사'를 열었습니다. 니콜라 테슬라 Nikola Tesla 에디슨과의 전류전쟁  이 회사는 에디슨의 직류시스템(DC)의 경쟁 상대인, 교류 전송 시스템(AC)을 고안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1890년대에 테슬라와 에디슨은 이른바 '전류 전쟁'을 벌였습니다. 테슬라의 AC는 DC에는 없는 몇 가지 장점이 있었는데, 특히 전류를 먼 거리로 전송하는 능력이 컸습니다. 그러나 에디슨은 AC가 너무 위험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전쟁의 전환점은 테슬라와 그의 사업 파트너인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시카고에서 열리는 세계 박람회의 전기 공급 계약을 성사시킨 1893년에 발생했습니다. 세계 박람회에서 그들은 수백만 명의 방문객 앞에서 AC를 입증해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1890년대 말 이미 AC의 승리가 명확해졌고, 20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몇 곳의 도시만이 DC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테슬라는 이미 새로운 도전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1897년에 라디오...

[인물]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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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라는 별명이 붙은 연쇄 살인범은 1888년 런던의 빈민가에서 다섯 명의 매춘부를 살해했습니다. 잭은 끝내 잡히지 않았고, 그 후로 누가 그렇게 섬뜩한 살인을 저질렀는지에 관한 수십 개의 가설이 제기되면서 그의 진짜 신원은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사건의 개요  살인은 당시 1200명의 매춘부가 거주하던 런던의 화이트채플이라는 지역에서 발생했습니다. 사건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런던 신문에 의하면 잭 더 리퍼라는 별명의 살인자는 일반적으로 중년의 여성을 금, 토, 일요일 밤에 공격했고 훼손된 피해자의 시신은 좁은 골목길에 버렸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보도는 수개월 동안 런던을 뒤흔들었습니다. 살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등장하는 선정적인 이야기는 대중의 관심을 런던의 빈민가로 이끌었고, 이는 경찰의 무능함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연쇄 살인범, 잭더리퍼(Jack the Ripper)  1888년 말, 런던의 한 신문사에 살인자가 썼다고 주장하는 몇 통의 편지가 전달되었습니다. 편지에는 더 많은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는 협박이 담겨 있었는데요. 그 아래에는 그 즉시 알아차릴 수 있는 '잭 더 리퍼'라는 서명이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이 편지는 진짜로 여겨졌으나 지금은 장난일 가능성이 더 많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피해자 중 한 사람의 시신 근처에서 반유대주의 낙서가 발견되었는데, 경찰은 그것이 사건과 무관하거나 살인자가 유대인이라고 믿게 만들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결론내렸습니다. 범인은 누구인가?  경찰은 결국 용의자를 네 명으로 추렸지만 이 범죄 혐의로 기소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후로 잭 더 리퍼를 연구하는 아마추어 리퍼학자(Ripperologist)들이 유명한 인상파 화가에서부터 여왕의 손자에 이르기까지 수십 명의 용의자를 제보했습니다. 해결은 되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여러모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런던의 경찰서장인 찰스 워런은 살인자를 잡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