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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조선의 과학기술자, 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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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실(1389년~1450년 경 사망 추정)은 조선의 과학기술자입니다. 조선 세종 때 상의원 별좌로 등용되어 과학기술자로서 조선의 천문학 기술을 찬란히 꽃피웠습니다.<세종실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유민으로 소주·항주 출신이고,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 기생이었는데, 장영실의 기술력이 뛰어나 세종 임금이 특히 아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장영실 표준영정 장영실의 능력  그는 경상도 관노 출신으로 온갖 것을 만들어내는 데 특출났고 조정에 들어와서도 사대부들의 관념적 성과를 실체화하면서 탁월한 성과를 보였습니다. 자격루라는 물시계는 장영실이 발명한 것 중 가장 유명합니다. 일정하게 흘려보낸 물의 차고 떠오름을 활용해 자동으로 시보를 알려주는 장치를 활용한 당대 최고의 발명품이지만 여전히 완벽하게 복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격루 제작 5년 후인 1438년에는 옥루라는 또 다른 물시계를 개발했습니다. 옥루의 내부는 기계 장치인 데 반해 외관은 유교적인 이상 사회를 표현한 예술적 조형물입니다. 자격루 장영실의 업적  장영실의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조선 최초 천문 관측대인 간의대뿐 아니라 해시계인 앙부일구, 해와 별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는 일성정시의 등 각종 발명품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습니다.  이러한 성과가 가능했던 이유는 천문학과 농업을 발전시켜 조선 사회를 윤택하게 만들고 싶었던 세종과 조선 전기 정치가들의 진취적인 기풍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조선 전기에는 중국의 과학 기술은 물론 이슬람 심지어 동로마 제국의 과학 기술까지 소개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앙부일구  자격루도 송나라 때 연숙, 심괄 등이 만든 물시계를 참고했고, 시보장치는 이슬람의 기술을 따왔습니다. 해시계는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천재 발명가 곽수경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슬람 지역을 정벌하면서 이슬람의 높은 과학 기술이 원나라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학 기술이 조선 전기에 활발히...

[인물]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군주,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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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1397년-1450년)은 조선을 넘어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 군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함께 한국사에서 '대왕' 칭호를 가진 인물로, 조선이라는 국가의 엄청난 발전을 이끈 임금이자, 한국사에 길이 남을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조선 4대왕으로,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재위하였습니다. 세종대왕 표준영정 세종의 즉위과정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킨 일련의 행동과 사건들로 인해 태종의 마음이 동요하였습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안정과 왕권을 이어받아 훌륭한 정치를 펴기에 양녕대군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태종의 마음이 이미 떠난 것을 알게 된 신하들은 그를 폐위할 것을 청하는 소를 올려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태종에게는 왕후 민씨 소생으로 양녕, 효령, 충녕 등 세 대군이 있었고, 양녕대군에게도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를 폐하고 새로이 세자를 세우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에 세자 폐립에 관해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종의 마음은 이미 셋째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1418년 6월에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라고 하며 세자로 책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처럼 충녕대군에 대한 세자책봉은 태종의 뜻에 따라 극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대부분의 신하들도 이를 환영하였습니다. 두 달 뒤인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선위를 이어받아 세자 충녕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가 바로 세종입니다. 세종의 국가경영  세종은 아버지 태종과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고려의 마지막 충절 정몽주, 조선의 건국자 정도전을 제거했습니다. 또 이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을 도왔던 처남 민무구, 민무질을 비롯한 여러 공신들도 가차 없이 제거하...

보이저 2호의 항해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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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째 날아가는 ‘인류의 우주 대사’… 보이저 2호, 여전히 항해 중  1977년 8월 20일, 미국 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내버럴. 하나의 탐사선이 태양계를 벗어나 우주의 끝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보이저 2호(Voyager 2). 발사 47년이 지난 지금도 이 우주선은 어둠의 성간 공간에서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항해 중입니다. 보이저 2호 이미지 외행성 4곳 최초 일괄 탐사… ‘위대한 항해’의 서막  보이저 2호는 NASA가 기획한 ‘행성 대탐사’ 프로젝트의 핵심 탐사선으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네 개의 거대 외행성을 모두 탐사한 유일한 우주선입니다. 당시 NASA는 외행성들의 일렬 배열이라는 수세기 만의 천문학적 기회를 이용해, 일명 ‘그랜드 투어’ 궤도를 통해 이들 행성을 연쇄적으로 방문하는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 결과, 보이저 2호는 1979년 목성, 1981년 토성, 1986년 천왕성, 1989년 해왕성을 차례로 탐사하며 각 행성의 고리, 위성, 자기장 등을 생생하게 포착해 전송했습니다. 그 가운데 천왕성과 해왕성은 지금까지도 보이저 2호가 유일하게 접근한 인류의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보이저 1호와 보이저 2호의 위치 성간 공간 진입, 지구와의 거리 208억 km  보이저 2호는 본래 외행성 탐사를 목적으로 설계됐지만, 임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2018년 11월 5일, 보이저 2호는 태양풍이 미치지 않는 태양권계면(Heliopause)을 지나며 성간 공간(Interstellar Space)에 진입했습니다. 이는 2012년 보이저 1호에 이은 두 번째 사례입니다.  현재 보이저 2호는 지구로부터 약 139.3 AU(약 208억 km) 떨어진 성간 공간에서 초당 15.3km(시속 약 55,000km) 속도로 이동 중입니다. NASA는 이 탐사선이 앞으로 수만 년간 은하를 떠돌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장비 하나씩 꺼져도… 마지막 신호까지 보내는 집념 ...

[인물] 후백제를 세운 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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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훤(甄萱, 867년 ~ 936년)은 신라 말기의 군인이자 후백제의 초대 국왕입니다. 892년에서 935년 음력 3월까지 후백제의 왕으로 재위한 그는 본래 통일신라의 장군이었으나 8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892년에 통일신라의 무진주를 습격하였으며, 900년에 통일신라의 완산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건국하게 됩니다.  927년 서라벌로 쳐들어가 붙잡은 신라의 경애왕을 스스로 자진하도록 하고 경순왕을 신라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935년 음력 3월에 아들인 신검이 일으킨 정변으로 축출되었다가 그 해 6월에 고려 측과 사위 박영규 등의 도움으로 후백제를 탈출하였습니다. 대리청정을 하던 신검은 같은 해 음력 10월 17일에 정식으로 즉위하였지만, 936년 음력 9월에 견훤을 앞세운 왕건 측의 총공격으로 후백제는 멸망하였습니다.  신검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왕건의 후백제 정벌에 앞장섰던 견훤은 신검이 왕건에 의해 일단 사면되는 조치를 받자 극도의 울분과 번민으로 등창이 일어나 크게 번졌고, 이에 며칠 후에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후백제 견훤 견훤의 생애  견훤은 경상북도 상주 출신으로 그 아버지는 아자개였습니다. 견훤은 하급 군인 출신으로 출정하는 곳에서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습니다.  그는 오늘날 전라도 일대에 나라를 세우는데 즉위 직후 교서에서 이미 후백제 창건의 당위성을 설파하였습니다. 삼한 중 마한이 으뜸이고 마한을 계승한 것이 백제인데, 신라에 의해 백제가 망했기 때문에 다시 백제를 세우겠다는 주장입니다.  영토로 보면 후백제가 후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작아 보이지만 어떤 지역보다 평야와 인구가 많아서 왕건보다 병사가 두 배나 많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후삼국 시대에 가장 강성했던 나라로 통상 후백제를 꼽기도 합니다. 견훤의 묘 후고구려, 신라와의 전투  무장 출신 견훤은 시종일관 전투를 통해 승부하려고 하였습니다. 궁예에 이어 왕건과 18년간 치열한 접전을 펼쳤고 팔공산 전...

[인물]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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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弓裔, 869년? ~ 918년)는 신라 시대 왕가 진골귀족 출신의 승려이자 태봉[후고구려에서 마진, 태봉으로 국호가 바뀜]의 군주입니다. 그는 신라 헌안왕 또는 경문왕과 후궁 사이에 태어난 서자였습니다. 속세에서의 성은 김(金)씨, 본관은 경주(慶州),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선종(善宗)입니다. 918년 왕건에게 축출되었습니다.  신라 왕실의 서자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유모가 피신시켜 죽음을 모면했고 이후 세달사로 피신하여 승려가 되었습니다.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자립하여 사병을 모으고 장군이 되었다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했습니다. 뒤에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변경했으나 스스로를 미륵으로 자처하면서 신정적 전제 왕권을 강력히 추진하였습니다.  이후 호족들과 태봉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군인, 불교 세력 및 유학자들과 갈등하던 중 918년 시중 왕건과 그를 추대한 군인, 왕건을 강력히 지지한 옛 고구려계의 패서 지역 호족들과 왕건을 지지한 유학자들에게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궁예 표준영정 후고구려를 건국하다  후삼국 시대에 후고구려를 건국한 왕. 정확한 출생 경위는 모르지만 신라 진골귀족의 후예라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신라 말기 진성여왕 때가 되면 지방 반란이 본격화됩니다. 죽주의 기획, 북원의 양길 등이 등장하는데 승려였던 궁예는 이들의 수하에 들어가서 강릉 일대에서 세를 도모하였습니다. 이후 철원, 개성 등으로 영역을 확대했고 결국 양길 세력을 물리친 후 후고구려를 세웠습니다.  궁예는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자주 바꾼 것으로 유명합니다. 국호를 901년에 후고구려, 904년에는 마진, 911년에는 태봉으로 바꿨고 수도도 송악(오늘날 개성)에서 철원으로 옮겼습니다. 불안정한 정국 운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데 다만 국호의 의미만큼은 곱씹어볼 만합니다. 마진은 대동방국이라는 의미이고, 태봉은 서로 화합하는 세상이라는 의미인데 고구려를 계승하고 백제와 신라를 포괄하는...

[인물] 고려의 태조, 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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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王建, 877–943) 고려의 초대 임금, 태조 왕건은 877년 음력 1월 14일(양력 2월 4일) 송악(지금의 개성)에서 태어났습니다. 발해계 호족의 외가와 고구려 계통의 가문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인망이 두터웠으며 풍수지리 전문가 도선(道詵)의 예언에 따라 태어난 인물로 전해집니다. 왕건 표준영정 궁예 휘하에서의 성장 896년 송악의 호족 왕륭과 왕건은 궁예에게 귀부했고, 왕건은 장군으로 활약하며 충주·청주·상주를 비롯해 육지와 해상을 오가며 후백제의 거점 나주를 여러 차례 공략했습니다. 해상전에서 화공 전략으로 승리를 거두며 도서 지대에도 영향력을 뻗혔고, 913년에는 시중(侍中)이 되어 정치∙군사적 2인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권력 장악과 건국 918년 궁예의 폭정을 이유로 신숭겸 등 무장과 귀족의 지지를 받은 왕건은 철원에서 반란을 일으켜 궁예를 축출하였습니다. 7월 30일 고려를 세운 뒤 수도를 송악으로 옮겼습니다. 호족 통합을 위해 정략결혼, 자제 유학, 식읍과 사심관 제도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공산전투에서 왕건과 신숭겸 후삼국 통일 전쟁 왕건은 신라와 우호관계를 구축해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자 지원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927년 공산 동수 전투에서는 패하고, 신숭겸 등이 전사하였습니다. 이후 930년 고창 병산 전투에서 유금필 등의 활약으로 후백제를 크게 격파하며 주도권을 회복하게 됩니다. 935년 견훤이 고려에 투항하고, 신라 경순왕도 사위로 맞이하며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통치 정책 * 호족 융합 : 각지 유력 가문과의 결혼 정책, 자제 도성 유학 수용, 사병 통제 등으로 권력 기반을 강화하였습니다. * 북진 정책 : 전진 기지인 서경 개척, 발해 유민 수용, 여진족·거란 견제 외교를 적극 추진하였습니다. * 숭불정책 : 왕사 임명(충담), 무차대회 개최, 사원 중수·건립 등을 통해 불교를 국가 기반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외교와 말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왕건은 강경 대응으로 사신을...

인간의 신체는 우주에서 폭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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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사람이 우주복 없이 우주 공간을 떠다닌다면 어떨까요? 사람의 몸이 폭발할까요? 눈알이 튀어나오고, 즉시 죽게 될 것까요? 이는 종종 공상과학 소설에서 다뤄지는 주제이기도 한데요, 실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의 신체가 우주 공간에 노출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지만 즉각적으로 치명적인 것은 아닙니다. 진공상태에 노출된다면?  만약 우주선 밖으로 우주복을 입지 않고 나갔다면, 사람의 신체는 여러 가지 극한 도전을 맞게 될 것입니다. 우선 숨을 쉬게 해주는 산소가 극도로 부족합니다. 우주에도 물론 산소가 존재하긴 하지만 너무나도 희박해서 1m² 내에서 한 개의 산소 원자를 찾는 것조차 힘듭니다. 주변이 거의 진공 상태이기 때문에 폐로 들이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주 유영을 하는 우주비행사, 브루스 매캔들리스 온도와 기압의 극한 환경  우주는 그늘에 있을 때 매우 추운 공간입니다. 절대 0도인 -273℃에서 고작 몇 ℃ 더 높을 뿐입니다. 그리고 열을 대류하거나 전도할 수 있는 매개체가 없습니다. 결국 몸 안의 모든 열이 복사로 빠져나가면서 동사할 것이지만 즉각적으로 발생하지는 않습니다.  가장 커다란 문제는 압력의 부재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신체는 주변 환경과 밸런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는 압력이 존재하지 않고 진공상태입니다. 여러분 신체 외부의 압력은 0기압인 반면, 신체 내부는 정상 기압(1기압) 상태입니다.  이와 같은 급격한 기압의 차이는 말 그대도 여러분의 숨을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폐에 있는 공기는 여러분이 재채기하는 것보다 빠르게 빠져나갈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숨을 참으려고 한다면, 아마도 몸이 급격하게 팽창하면서 신체 조직들이 찢겨 나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숨을 참으면 안 됩니다. 또한 변도 밖으로 배출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여러분은 배변 냄새를 맡지 못할 것입니다. 체액의 증발  여러분의 피부 주변에 액체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