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인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

Image
고대 철학의 문을 연 사람, 탈레스  기원전 6세기, 지금의 터키 서부에 해당하는 그리스 도시국가 밀레투스에서 한 인물이 당시 사람들의 상식을 뒤흔드는 놀라운 예측을 합니다. 그의 이름은 탈레스(Thales of Miletus, 기원전 620년경~546년경). 그는 철학자이자 과학자, 상인이자 천문학자였습니다. 철학자 탈레스 이성을 통해 하늘을 읽다  기원전 585년 5월 28일, 탈레스는 한 가지 충격적인 주장을 내놓습니다. 개기일식이 그날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한 것입니다. 당대 사람들은 천체 현상은 신들의 뜻이며 인간이 예측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탈레스는 자연 현상은 인간의 이성으로 분석하고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습니다. 이 개기일식은 지금의 터키 지역에서 관측되었고, 사람들은 큰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그 공포 속에서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신의 분노로 여겨졌던 자연 현상이 인간의 지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습니다. 자연을 신에서 분리하다  탈레스 이전까지는 자연과 신의 세계가 명확히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지진은 신의 분노, 가뭄은 신의 저주로 여겨졌지요. 하지만 탈레스는 현상의 원인을 자연 내부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근원(아르케, arche)을 ‘물’이라고 보았고, 모든 생명의 시작이자 변화의 본질이 물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단순한 과학적 추측이 아니라, 자연 현상과 신화를 구분하려는 첫 철학적 시도였습니다. 밀레투스 유적지 전경 철학, ‘지혜를 사랑하는 일’  탈레스는 “자연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후대에서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시도한 것은 단순히 하늘을 읽는 일이 아니라 세상을 지혜롭게 이해하려는 방법의 혁신이었습니다. 실제로 ‘철학(philosophy)’이라는 단어는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고 합...

[인물] 고대 이집트 파라오, 쿠푸(Khufu)

Image
위대한 피라미드의 주인, 이집트 파라오 쿠푸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쿠푸(Khufu, 기원전 2609년경~2566년경)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장대한 무덤인 기자(Giza)의 대피라미드를 남긴 인물로,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은 세계적인 유산과 함께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는 이집트 제4왕조의 제2대 왕으로, 아버지 스네프루의 뒤를 이어 20대의 젊은 나이에 파라오가 되었습니다. 쿠푸 조각상 스스로의 위대함을 위한 무덤  쿠푸는 자신의 무덤을 단순한 매장 공간이 아닌, 위엄과 신성함의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는 사막 한가운데 석회석으로 거대한 피라미드를 쌓아 올렸고, 이 구조물이 자신이 사후에 걸어갈 길을 지켜주며, 자신이 23년 동안 다스린 이집트의 영광을 후세에 기억시키길 바랬습니다.  이처럼 종교적 의미도 깊었죠. 고대 이집트인들은 파라오가 죽으면 하늘로 올라가 살아 있는 신이 된다고 믿었으며, 피라미드는 그 신성한 여정을 도와주는 성스러운 구조물로 여겨졌습니다. 고대 세계의 불가사의  쿠푸의 피라미드는 단지 무덤이 아니라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완공 당시에도 압도적인 규모였지만, 이후 4,000년 넘게 지구에서 가장 큰 인공 구조물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했습니다. 대피라미드는 약 230만 개의 석회석 블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에는 최대 15톤 무게의 돌덩이도 포함돼 있습니다. 전체 무게는 무려 600만 톤에 달합니다.  건축 자재 대부분은 기자 인근에서 채석되었고, 나일강을 따라 뗏목으로 운반된 후 대규모 경사로를 따라 끌어올려 건설 현장에 도달했습니다. 일부 석재는 레바논 등 외국에서 수입된 것도 있어, 피라미드 건설이 단지 기술적인 도전이 아니라 국제적 자원 조달까지 아우른 국가적인 대사업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쿠푸의 대 피라미드 피라미드와 그 주변  쿠푸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가족들을 위한 무덤들도 함께 세웠습니다. 그의 아내들과 친척들을 위한 작은 피라미드가 대피...

[인물] 목민심서의 실학자, 정약용

Image
 정약용(1762년-1836년)은 조선 후기 정조 대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입니다. 2012년,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아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정약용 초상 정약용의 생애  그는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및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를 배우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1776년에는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때마침 이 때 부친의 벼슬살이 덕택에 서울에서 살게 되어,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이가환과 학문의 정도가 상당하던 매부 이승훈이 모두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도 이익의 유서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익은 근기학파의 중심적 인물이었습니다.  정약용이 어린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이론에 접했다고 하는 것은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약용 자신이 훗날 이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단초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약용의 거중기 정약용의 유배생활  정약용은 정조 집권 시절 정력적으로 개혁 사업을 도왔고, 특히 화성 건설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조 사후 천주교도라는 혐의로 강진에서 무려 18년간 고단한 유배 생활을 보내게 됩니다.  그의 형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당당하게 고백한 후 참수를 당했고 다른 형인 정약전과 정약용 또한 유배 길에 오른 것입니다. 정약전은 흑산도,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났는데 함께 내려가다 나주 율정에서 헤어졌습니다. 각 유배지에서 큰 학문적 업적을 이뤘으나 형제는 이후 영원히 만나지 못했습니다.  정약전은 죽기 전까지 동생 정약용과 편지로 교류했고 흑산도 유배지에서 “자산어보”를 남겼습니다. 흑산도 생태를 관찰한 기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 생물학서로 봐도 무방합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 정약...

[인물] 조선의 과학기술자, 장영실

Image
 장영실(1389년~1450년 경 사망 추정)은 조선의 과학기술자입니다. 조선 세종 때 상의원 별좌로 등용되어 과학기술자로서 조선의 천문학 기술을 찬란히 꽃피웠습니다.<세종실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유민으로 소주·항주 출신이고,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 기생이었는데, 장영실의 기술력이 뛰어나 세종 임금이 특히 아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장영실 표준영정 장영실의 능력  그는 경상도 관노 출신으로 온갖 것을 만들어내는 데 특출났고 조정에 들어와서도 사대부들의 관념적 성과를 실체화하면서 탁월한 성과를 보였습니다. 자격루라는 물시계는 장영실이 발명한 것 중 가장 유명합니다. 일정하게 흘려보낸 물의 차고 떠오름을 활용해 자동으로 시보를 알려주는 장치를 활용한 당대 최고의 발명품이지만 여전히 완벽하게 복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격루 제작 5년 후인 1438년에는 옥루라는 또 다른 물시계를 개발했습니다. 옥루의 내부는 기계 장치인 데 반해 외관은 유교적인 이상 사회를 표현한 예술적 조형물입니다. 자격루 장영실의 업적  장영실의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조선 최초 천문 관측대인 간의대뿐 아니라 해시계인 앙부일구, 해와 별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는 일성정시의 등 각종 발명품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습니다.  이러한 성과가 가능했던 이유는 천문학과 농업을 발전시켜 조선 사회를 윤택하게 만들고 싶었던 세종과 조선 전기 정치가들의 진취적인 기풍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조선 전기에는 중국의 과학 기술은 물론 이슬람 심지어 동로마 제국의 과학 기술까지 소개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앙부일구  자격루도 송나라 때 연숙, 심괄 등이 만든 물시계를 참고했고, 시보장치는 이슬람의 기술을 따왔습니다. 해시계는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천재 발명가 곽수경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슬람 지역을 정벌하면서 이슬람의 높은 과학 기술이 원나라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학 기술이 조선 전기에 활발히...

[인물]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군주, 세종대왕

Image
 세종대왕(1397년-1450년)은 조선을 넘어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 군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함께 한국사에서 '대왕' 칭호를 가진 인물로, 조선이라는 국가의 엄청난 발전을 이끈 임금이자, 한국사에 길이 남을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조선 4대왕으로,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재위하였습니다. 세종대왕 표준영정 세종의 즉위과정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킨 일련의 행동과 사건들로 인해 태종의 마음이 동요하였습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안정과 왕권을 이어받아 훌륭한 정치를 펴기에 양녕대군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태종의 마음이 이미 떠난 것을 알게 된 신하들은 그를 폐위할 것을 청하는 소를 올려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태종에게는 왕후 민씨 소생으로 양녕, 효령, 충녕 등 세 대군이 있었고, 양녕대군에게도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를 폐하고 새로이 세자를 세우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에 세자 폐립에 관해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종의 마음은 이미 셋째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1418년 6월에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라고 하며 세자로 책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처럼 충녕대군에 대한 세자책봉은 태종의 뜻에 따라 극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대부분의 신하들도 이를 환영하였습니다. 두 달 뒤인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선위를 이어받아 세자 충녕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가 바로 세종입니다. 세종의 국가경영  세종은 아버지 태종과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고려의 마지막 충절 정몽주, 조선의 건국자 정도전을 제거했습니다. 또 이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을 도왔던 처남 민무구, 민무질을 비롯한 여러 공신들도 가차 없이 제거하...

보이저 2호의 항해는 끝나지 않았다

Image
47년째 날아가는 ‘인류의 우주 대사’… 보이저 2호, 여전히 항해 중  1977년 8월 20일, 미국 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내버럴. 하나의 탐사선이 태양계를 벗어나 우주의 끝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보이저 2호(Voyager 2). 발사 47년이 지난 지금도 이 우주선은 어둠의 성간 공간에서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항해 중입니다. 보이저 2호 이미지 외행성 4곳 최초 일괄 탐사… ‘위대한 항해’의 서막  보이저 2호는 NASA가 기획한 ‘행성 대탐사’ 프로젝트의 핵심 탐사선으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네 개의 거대 외행성을 모두 탐사한 유일한 우주선입니다. 당시 NASA는 외행성들의 일렬 배열이라는 수세기 만의 천문학적 기회를 이용해, 일명 ‘그랜드 투어’ 궤도를 통해 이들 행성을 연쇄적으로 방문하는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 결과, 보이저 2호는 1979년 목성, 1981년 토성, 1986년 천왕성, 1989년 해왕성을 차례로 탐사하며 각 행성의 고리, 위성, 자기장 등을 생생하게 포착해 전송했습니다. 그 가운데 천왕성과 해왕성은 지금까지도 보이저 2호가 유일하게 접근한 인류의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보이저 1호와 보이저 2호의 위치 성간 공간 진입, 지구와의 거리 208억 km  보이저 2호는 본래 외행성 탐사를 목적으로 설계됐지만, 임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2018년 11월 5일, 보이저 2호는 태양풍이 미치지 않는 태양권계면(Heliopause)을 지나며 성간 공간(Interstellar Space)에 진입했습니다. 이는 2012년 보이저 1호에 이은 두 번째 사례입니다.  현재 보이저 2호는 지구로부터 약 139.3 AU(약 208억 km) 떨어진 성간 공간에서 초당 15.3km(시속 약 55,000km) 속도로 이동 중입니다. NASA는 이 탐사선이 앞으로 수만 년간 은하를 떠돌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장비 하나씩 꺼져도… 마지막 신호까지 보내는 집념 ...

[인물] 후백제를 세운 견훤

Image
 견훤(甄萱, 867년 ~ 936년)은 신라 말기의 군인이자 후백제의 초대 국왕입니다. 892년에서 935년 음력 3월까지 후백제의 왕으로 재위한 그는 본래 통일신라의 장군이었으나 8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892년에 통일신라의 무진주를 습격하였으며, 900년에 통일신라의 완산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건국하게 됩니다.  927년 서라벌로 쳐들어가 붙잡은 신라의 경애왕을 스스로 자진하도록 하고 경순왕을 신라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935년 음력 3월에 아들인 신검이 일으킨 정변으로 축출되었다가 그 해 6월에 고려 측과 사위 박영규 등의 도움으로 후백제를 탈출하였습니다. 대리청정을 하던 신검은 같은 해 음력 10월 17일에 정식으로 즉위하였지만, 936년 음력 9월에 견훤을 앞세운 왕건 측의 총공격으로 후백제는 멸망하였습니다.  신검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왕건의 후백제 정벌에 앞장섰던 견훤은 신검이 왕건에 의해 일단 사면되는 조치를 받자 극도의 울분과 번민으로 등창이 일어나 크게 번졌고, 이에 며칠 후에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후백제 견훤 견훤의 생애  견훤은 경상북도 상주 출신으로 그 아버지는 아자개였습니다. 견훤은 하급 군인 출신으로 출정하는 곳에서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습니다.  그는 오늘날 전라도 일대에 나라를 세우는데 즉위 직후 교서에서 이미 후백제 창건의 당위성을 설파하였습니다. 삼한 중 마한이 으뜸이고 마한을 계승한 것이 백제인데, 신라에 의해 백제가 망했기 때문에 다시 백제를 세우겠다는 주장입니다.  영토로 보면 후백제가 후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작아 보이지만 어떤 지역보다 평야와 인구가 많아서 왕건보다 병사가 두 배나 많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후삼국 시대에 가장 강성했던 나라로 통상 후백제를 꼽기도 합니다. 견훤의 묘 후고구려, 신라와의 전투  무장 출신 견훤은 시종일관 전투를 통해 승부하려고 하였습니다. 궁예에 이어 왕건과 18년간 치열한 접전을 펼쳤고 팔공산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