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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지식과 호기심의 상징, 플리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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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으로 향한 한 남자  79년 8월 24일, 이탈리아 남부 베수비오산이 거대한 화산 폭발을 일으켰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쳤지만 단 한 사람은 정반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바로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 23년경~79년).  도망치는 대신 화산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자 했던 그는 동시에 로마 해군 사령관으로서 주민들을 구출하려는 사명감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산에서 분출된 유독 가스와 화산재에 휩싸여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한 인간의 호기심과 책임감이 빚어낸 비극이자 영웅적인 최후로 전해집니다.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 지칠 줄 모르는 지식의 탐구자  플리니우스의 본명은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Gaius Plinius Secundus). 그는 로마의 중상류 계급인 에퀴테스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 탐구에 열정을 보였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 전역을 여행하며 자신이 본 것을 기록했습니다. 포도주 양조법, 금광 채굴 방식, 산맥의 지질 구조, 동식물의 생태 등 그의 관심은 끝이 없었죠.  이 방대한 호기심은 결국 <박물지(Naturalis Historia)>라는 37권의 대작을 탄생시켰습니다. 77년에 완성된 이 책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게 바쳐졌고 이후 수 세기 동안 학자들이 표준 참고서로 활용했습니다. 1669년 출간된 플리니우스의 <박물지> 베수비오의 비극, 그리고 남겨진 기록  화산 폭발 당시 플리니우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분화구 위로 솟아오르는 ‘버섯 모양의 연기 기둥’을 관찰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화산학에서 중요한 역사적 기록으로 평가됩니다.  흥미롭게도 그의 조카이자 양자였던 ‘플리니우스 더 영거(Pliny the Younger)’는 삼촌의 최후를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는 서신을 통해 베수비오 화산 폭발의 참상을 자세히 기록했는데 이 편지는 지금까지도 가장 중요한 1차 사료...

[인물] 카르타고의 천재 장군, 한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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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 기원전 247년~기원전 183년경)는 고대 카르타고의 군사 전략가이자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주역으로 로마가 맞닥뜨린 가장 무시무시한 적수였습니다. 그는 전투에서 천재적인 기동과 전략을 보여주었으며 이름만으로도 로마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 어린 시절과 맹세  한니발은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패한 카르타고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스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홉 살 무렵, 그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바알 신 앞에서 평생 로마와 싸우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이 어린 시절의 맹세는 그의 일생을 규정하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알프스 횡단과 이탈리아 침공  기원전 22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한니발은 카르타고군의 지휘권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는 곧바로 로마 본토를 직접 공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기원전 218년, 약 2만 5천 명의 군사와 수천 마리의 말, 그리고 수십 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했습니다. 험준한 산맥을 넘는 동안 병력의 절반과 코끼리 대부분을 잃었지만 이 대담한 행군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적 모험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한니발의 침입로 이탈리아에서의 17년  한니발은 이후 17년 동안 이탈리아 땅에서 로마와 전투를 벌였다. 특히 트라시메네 호수 전투(기원전 217년)와 칸나에 전투(기원전 216년)에서 그는 압도적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천재적인 전술로 로마군을 괴멸시켰습니다. 칸나에에서 로마군은 약 5만 명 이상이 전사했는데 이는 로마 역사상 최악의 패배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끝내 항복하지 않고 오히려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하는 전략으로 전환했습니다. 자마 전투와 패배  기원전 202년, 한니발은 카르타고를 지키기 위해 귀환했으나 아프리카의 자마 전투에서 로마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패배했습니다. 이 전투는 포에니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한니발의 야망은 좌절...

[인물] 배신자이자 숙명의 사도, 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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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의 12사도 중 한 명이었던 유다 이스가리옷(Judas Iscariot)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은전 30량을 받고 예수를 로마 군대와 유대 지도자들에게 넘겼으며 그 결과 예수는 체포되어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다는 2,000년 넘게 ‘인류 역사상 가장 악한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습니다. 유다의 이름과 배경  ‘이스가리옷’이라는 이름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라틴어 시카리우스(sicarius), 즉 ‘단검을 든 자’ 혹은 ‘살인자’에서 유래했다고 보며, 또 다른 해석으로는 유다가 가리옷(이스카리옷)이라는 유대 지역 출신임을 나타내는 지명적 의미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유다는 예수의 제자들 중 회계 담당자였으며 돈궤를 맡아 관리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그가 자주 공동 재정을 훔쳤다고 기록하며 배신자의 이미지에 부정적인 색채를 덧입히고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빠져나오는 유다 배신의 순간 - 겟세마네 동산의 입맞춤  예수와 제자들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들어갔고 성전에서 대금업자들을 몰아내며 종교 권력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와 대제사장 요셉 가야바는 예수를 위험한 선동자로 간주하고 제거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때 내부 협력자가 필요했고 유다가 매수 대상이 되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이 끝난 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예수에게 군사들이 들이닥쳤습니다. 바로 그때 유다는 군사들에게 예수를 지목하기 위해 입맞춤을 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입맞춤으로 배신한다’라는 표현은 바로 이 사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유다의 최후 - 두 가지 전승 유다의 말로에 대해서는 성경 내에서도 서로 다른 전승이 전해집니다. * <마태복음>에 따르면, 유다는 배신 이후 양심의 가책을 느껴 은전을 돌려주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그가 목을 맨 나무는 후대...

[인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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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 메시아의 길을 준비한 자 기원후 30년경, 한 유대인 설교자가 갈릴리의 분봉왕 헤로데 안티파스를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그는 헤로데가 간통과 근친혼을 비롯해 여러 사악한 일을 저질렀다고 공개적으로 지적했습니다. 분노한 왕은 곧 이 설교자를 체포하여 사해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인물이 바로 세례자 요한(John the Baptist, 기원전 6년경~서기 30년경)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한 자, 곧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불립니다. 그의 삶과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종교적 행적을 넘어 기독교 신학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습니다. 세례자 요한 광야의 선지자 세례자 요한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성경의 단편적인 기록과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저술을 통해 그의 일생을 짐작할 뿐입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그는 예수의 친척(사촌)으로 나사렛 지역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단순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메뚜기와 야생 꿀을 먹으며 유대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오랜 은둔 끝에 그는 대중 앞에 나타나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는 요르단 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며, 탐욕과 착취를 버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대비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로써 수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났고 그들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와 세례자 요한 세례자 요한은 단순한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메시아가 곧 온다는 것을 확신했고 자신은 그 길을 준비하는 "전령"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예수 역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요한에게 나아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예수의 공적 사역을 알리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세례 직후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왔으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

[인물] 유레카를 외치다, 아르키메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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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키메데스: 유레카의 순간과 천재 발명가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기원전 287년경~212년경)는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과학자이자 발명가, 수학자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도 과학적 발견과 창의적 발명의 상징처럼 회자됩니다.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유레카! - 왕관과 부력의 발견  아르키메데스에 얽힌 가장 유명한 일화는 ‘왕관의 금 순도’를 밝히는 과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시라쿠사의 왕이 금세공업자가 만든 왕관이 순금인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목욕 중에 해결책을 떠올렸습니다. 물에 몸을 담갔을 때 넘쳐나는 물을 보고 물체가 잠겼을 때 밀어내는 물의 부피가 곧 그 물체의 부피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로써 그는 부력의 원리를 발견했고 환희에 찬 나머지 “유레카!(찾았다)”를 외치며 벌거벗은 채 거리로 달려나갔다고 전해집니다. 이 일화는 과학사에서 창조적 직관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생애와 업적  아르키메데스는 시칠리아 섬의 도시국가 시라쿠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뛰어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공학자로서 고대 과학의 정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연구는 기하학, 수론, 물리학, 역학 등 여러 학문에 걸쳐 있으며 특히 원주율(π)을 계산하고 무게 중심과 지렛대 원리를 이론적으로 정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한때 “나에게 설 수 있는 지점만 준다면 지구라도 들어올리겠다”라고 말하며 지렛대의 위력을 설명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그는 실용적 발명에도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 아르키메데스의 나선형 펌프: 물을 빠르게 퍼올려 배를 가볍게 하는 장치로 오늘날에도 농업과 토목에서 응용되고 있습니다. * 아르키메데스의 갈고리: 쇠사슬과 갈고리를 이용해 적군의 배를 들어 올려 전복시키는 방어 무기입니다. * 열선 무기: 거대한 거울을 사용해 태양광을 모아 적의 함선을 불태운다는 장치. 실제로 가능했는지는 논쟁이 이어지고 있지만...

[인물] 진시황제: 최초의 황제, 영원한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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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제(秦始皇帝, 기원전 259년~기원전 210년)는 중국 역사에서 최초로 전국을 통일한 황제로 고대 동아시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그는 강력한 권력으로 제국을 통합하고 중앙집권적 체제를 수립했지만 동시에 잔혹한 폭정과 문화적 탄압으로 악명 높은 통치자이기도 합니다. 진 시황제(始皇帝) 출생과 즉위  진시황제의 본명은 영정(嬴政)입니다. 기원전 259년, 전국시대의 혼란 속에서 진나라 왕실의 세자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중국은 진(秦), 초(楚), 연(燕), 제(齊), 한(韓), 조(趙), 위(魏)의 일곱 강국이 패권을 다투던 시대였습니다. 영정은 어린 나이인 기원전 246년, 열세 살에 진나라의 왕으로 즉위했으며 섭정 대신들과 권력 투쟁을 벌이며 점차 강력한 군주로 성장해 갔습니다.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  기원전 221년, 그는 마지막 독립국을 정복하고 마침내 중국 전역을 통일하였습니다. 스스로를 ‘황제(皇帝)’라 칭하며 새로운 정치 질서를 열었는데 이는 이후 2,000여 년간 이어질 중국 제왕의 칭호가 되었습니다. 그는 봉건 제도를 철저히 폐지하고 귀족들의 무기를 몰수했으며 지방 방어 시설을 철거해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화폐, 도량형, 문자, 법률을 표준화하여 중국 사회를 하나의 체계 속에 묶어냈습니다. 진시황릉 병마용 폭정과 문화 탄압  진시황제는 반대파를 철저히 억누르기 위해 사상과 문화를 통제했습니다. 특히 유교 학자들을 탄압하고 고전 서적을 불태운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은 그의 통치가 가진 잔혹성과 억압을 상징합니다. 또한 거대한 건축 사업에 수많은 인력이 강제로 동원되었고 열악한 환경에서 수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만리장성 축조 사업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암살 시도와 불멸의 꿈  그는 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늘 암살의 표적이 되었으며 실제로 세 차례의 암살 시도를 가까스로 피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죽음을 극복하려는 집념으로 불사의 약을 찾기 위해 ...

[인물] 깨달음과 불교, 부처(석가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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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고통에서 해탈을 찾은 깨달음의 스승  ‘부처(The Buddha, 기원전 563년~483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오늘날 네팔 남부 룸비니 근처의 작은 왕국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싯다르타 고타마(Siddhārtha Gautama)’로 전설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그 지역을 다스리던 왕 슈도다나였고 어머니는 마야 부인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히말라야 기슭의 풍요로운 궁전에서 부와 권세, 그리고 모든 세속적 쾌락을 누리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젊은 왕자는 그 안락한 삶 속에서도 만족을 찾지 못했습니다. 부처 석가모니 출가, 그리고 고통의 근원에 대한 탐구  궁전 밖으로 나서면서 석가모니는 인생의 보편적인 진실인 늙음, 병듦, 죽음 등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고통(dukkha)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원인을 밝히려는 결심을 했습니다. 스물아홉 살 무렵, 그는 갓 태어난 아들 라훌라를 뒤로하고 궁궐을 떠나 ‘출가(出家)’의 길을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고행과 금욕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했으나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삶 역시 진리로 가는 길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지나친 쾌락과 고통의 양극단을 모두 버린 중도(中道, Middle Way)가 참된 길이라는 통찰에 도달한 것입니다. 깨달음과 불교의 탄생  35세가 되던 해, 석가모니는 인도 보드가야의 보리수(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49일간 깊은 명상에 몰입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존재와 고통의 본질을 통찰하는 깨달음(大覺, Enlightenment)을 얻었고 그때부터 ‘깨달은 이’라는 뜻의 부처(Buddha)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후 설법을 통해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를 가르쳤습니다. * 사성제는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 진리로, 고통의 존재와 그 원인(집착과 욕망), 고통의 소멸, 그리고 그것으로 이르는 길을 제시합니다. * 팔정도는 올바른 견해, 올바른 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