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독일의 천문학자, 수학자, 음악학자입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함께 과학혁명의 선구자이자 천체역학의 창시자로 불립니다. 주요 업적으로는 행성 운동을 표현하는 케플러의 법칙이 있습니다. 미국 성공회에서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와 함께 성인으로 추대받고 있기도 합니다.
천문학자 케플러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년~1630년) 생전에 그의 조국 독일은 지속적인 종교적 폭력과 사회적·정치적 혼란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케플러는 궁정 쿠데타, 농민 봉기, 심지어 자신의 가족을 겨냥한 마녀사냥까지 견뎌냈습니다. 이런 힘든 배경 에도 그는 행성들이 천체에서 움직이는 방법을 현대 과학으로 이해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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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
케플러는 마녀 혐의를 받은 어머니 카타리나를 변호하기 위해 1615년에서 1620년 사이에 뷔르템베르크를 여러 번 방문해야 했습니다. 카타리나는 '마녀의 통제력'으로 열두 살 소녀를 마비시킨 혐의를 받고 수감되어 고문을 당했지만, 커플러가 뷔르템베르크 공작의 배후를 조정한 후 풀려나 운 좋게 처형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케플러의 증조할머니를 포함해 수십만 명의 유럽 여성이 17세기 초에 유럽 중부를 휩쓴 마녀사냥으로 화형당했습니다.
케플러의 생애
케플러는 슈바빙이라는 독일 남서부 지방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를 버린 ‘부도덕하고, 거칠며, 싸움을 일삼는 병사’였습니다. 그래서 케플러는 어린 시절 조부모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원래 그는 개신교 목사가 되려고 열세 살에 신학교에 입학했고 1591년에 신학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594년 그라츠에 정착해 수학 교수가 되었고, 그로부터 3년 후에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1600년에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길 거절하면서 대학교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같은 해에 프라하로 피신한 그는 덴마크 천문학자인 튀코 브라헤를 소개받았습니다. 케플러와 마찬가지로 얼마 전 프라하로 피신한 브라헤가 이 젊은 수학자를 조수로 고용하면서 케플러는 브라헤가 죽고 난 후 황제의 수학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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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플러가 6살 때 목격한 대혜성 |
브라헤의 업적을 이어받다
브라헤의 연구업적을 바탕으로 하여 케플러는 별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세 가지 물리적인 법칙의 개요를 작성했습니다. 그는 1609년 “신천문학”이라는 논문에서 첫 두 가지 법칙을 발표했고, 세 번째 법칙은 1619년에 출간되었습니다. 브라헤와 달리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확고히 믿었던 케플러는 태양중심설을 옹호하는 최초의 글을 출간했습니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유럽 중부에서 발발한 종교 갈등이었던 30년 전쟁의 혼란으로 케플러는 연구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 2년 동안 그는 독일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폭력을 피하려고 애썼습니다. 케플러가 사망한 후 그가 묻힌 교회 경내가 군대의 침입으로 약탈당하고 훼손되면서 케플러의 파란만장한 삶에 슬픈 후기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나사는 2009년 3월, 위대한 천문학자 케플러의 이름을 딴 인공위성을 발사했습니다. 이 인공위성은 생물이 살 수 있는 다른 행성을 찾아내기 위해 먼 태양계에 있는 지구 크기의 행성들을 찾아 은하계를 탐색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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