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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July, 2025

[인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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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철학의 문을 연 사람, 탈레스  기원전 6세기, 지금의 터키 서부에 해당하는 그리스 도시국가 밀레투스에서 한 인물이 당시 사람들의 상식을 뒤흔드는 놀라운 예측을 합니다. 그의 이름은 탈레스(Thales of Miletus, 기원전 620년경~546년경). 그는 철학자이자 과학자, 상인이자 천문학자였습니다. 철학자 탈레스 이성을 통해 하늘을 읽다  기원전 585년 5월 28일, 탈레스는 한 가지 충격적인 주장을 내놓습니다. 개기일식이 그날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한 것입니다. 당대 사람들은 천체 현상은 신들의 뜻이며 인간이 예측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탈레스는 자연 현상은 인간의 이성으로 분석하고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습니다. 이 개기일식은 지금의 터키 지역에서 관측되었고, 사람들은 큰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그 공포 속에서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신의 분노로 여겨졌던 자연 현상이 인간의 지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습니다. 자연을 신에서 분리하다  탈레스 이전까지는 자연과 신의 세계가 명확히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지진은 신의 분노, 가뭄은 신의 저주로 여겨졌지요. 하지만 탈레스는 현상의 원인을 자연 내부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근원(아르케, arche)을 ‘물’이라고 보았고, 모든 생명의 시작이자 변화의 본질이 물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단순한 과학적 추측이 아니라, 자연 현상과 신화를 구분하려는 첫 철학적 시도였습니다. 밀레투스 유적지 전경 철학, ‘지혜를 사랑하는 일’  탈레스는 “자연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후대에서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시도한 것은 단순히 하늘을 읽는 일이 아니라 세상을 지혜롭게 이해하려는 방법의 혁신이었습니다. 실제로 ‘철학(philosophy)’이라는 단어는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고 합...

[인물] 고대 이집트 파라오, 쿠푸(Khu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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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피라미드의 주인, 이집트 파라오 쿠푸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쿠푸(Khufu, 기원전 2609년경~2566년경)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장대한 무덤인 기자(Giza)의 대피라미드를 남긴 인물로,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은 세계적인 유산과 함께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는 이집트 제4왕조의 제2대 왕으로, 아버지 스네프루의 뒤를 이어 20대의 젊은 나이에 파라오가 되었습니다. 쿠푸 조각상 스스로의 위대함을 위한 무덤  쿠푸는 자신의 무덤을 단순한 매장 공간이 아닌, 위엄과 신성함의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는 사막 한가운데 석회석으로 거대한 피라미드를 쌓아 올렸고, 이 구조물이 자신이 사후에 걸어갈 길을 지켜주며, 자신이 23년 동안 다스린 이집트의 영광을 후세에 기억시키길 바랬습니다.  이처럼 종교적 의미도 깊었죠. 고대 이집트인들은 파라오가 죽으면 하늘로 올라가 살아 있는 신이 된다고 믿었으며, 피라미드는 그 신성한 여정을 도와주는 성스러운 구조물로 여겨졌습니다. 고대 세계의 불가사의  쿠푸의 피라미드는 단지 무덤이 아니라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완공 당시에도 압도적인 규모였지만, 이후 4,000년 넘게 지구에서 가장 큰 인공 구조물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했습니다. 대피라미드는 약 230만 개의 석회석 블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에는 최대 15톤 무게의 돌덩이도 포함돼 있습니다. 전체 무게는 무려 600만 톤에 달합니다.  건축 자재 대부분은 기자 인근에서 채석되었고, 나일강을 따라 뗏목으로 운반된 후 대규모 경사로를 따라 끌어올려 건설 현장에 도달했습니다. 일부 석재는 레바논 등 외국에서 수입된 것도 있어, 피라미드 건설이 단지 기술적인 도전이 아니라 국제적 자원 조달까지 아우른 국가적인 대사업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쿠푸의 대 피라미드 피라미드와 그 주변  쿠푸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가족들을 위한 무덤들도 함께 세웠습니다. 그의 아내들과 친척들을 위한 작은 피라미드가 대피...

[인물] 목민심서의 실학자,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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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1762년-1836년)은 조선 후기 정조 대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입니다. 2012년,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아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정약용 초상 정약용의 생애  그는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및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를 배우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1776년에는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때마침 이 때 부친의 벼슬살이 덕택에 서울에서 살게 되어,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이가환과 학문의 정도가 상당하던 매부 이승훈이 모두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도 이익의 유서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익은 근기학파의 중심적 인물이었습니다.  정약용이 어린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이론에 접했다고 하는 것은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약용 자신이 훗날 이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단초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약용의 거중기 정약용의 유배생활  정약용은 정조 집권 시절 정력적으로 개혁 사업을 도왔고, 특히 화성 건설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조 사후 천주교도라는 혐의로 강진에서 무려 18년간 고단한 유배 생활을 보내게 됩니다.  그의 형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당당하게 고백한 후 참수를 당했고 다른 형인 정약전과 정약용 또한 유배 길에 오른 것입니다. 정약전은 흑산도,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났는데 함께 내려가다 나주 율정에서 헤어졌습니다. 각 유배지에서 큰 학문적 업적을 이뤘으나 형제는 이후 영원히 만나지 못했습니다.  정약전은 죽기 전까지 동생 정약용과 편지로 교류했고 흑산도 유배지에서 “자산어보”를 남겼습니다. 흑산도 생태를 관찰한 기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 생물학서로 봐도 무방합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 정약...

[인물] 조선의 과학기술자, 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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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실(1389년~1450년 경 사망 추정)은 조선의 과학기술자입니다. 조선 세종 때 상의원 별좌로 등용되어 과학기술자로서 조선의 천문학 기술을 찬란히 꽃피웠습니다.<세종실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유민으로 소주·항주 출신이고,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 기생이었는데, 장영실의 기술력이 뛰어나 세종 임금이 특히 아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장영실 표준영정 장영실의 능력  그는 경상도 관노 출신으로 온갖 것을 만들어내는 데 특출났고 조정에 들어와서도 사대부들의 관념적 성과를 실체화하면서 탁월한 성과를 보였습니다. 자격루라는 물시계는 장영실이 발명한 것 중 가장 유명합니다. 일정하게 흘려보낸 물의 차고 떠오름을 활용해 자동으로 시보를 알려주는 장치를 활용한 당대 최고의 발명품이지만 여전히 완벽하게 복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격루 제작 5년 후인 1438년에는 옥루라는 또 다른 물시계를 개발했습니다. 옥루의 내부는 기계 장치인 데 반해 외관은 유교적인 이상 사회를 표현한 예술적 조형물입니다. 자격루 장영실의 업적  장영실의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조선 최초 천문 관측대인 간의대뿐 아니라 해시계인 앙부일구, 해와 별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는 일성정시의 등 각종 발명품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습니다.  이러한 성과가 가능했던 이유는 천문학과 농업을 발전시켜 조선 사회를 윤택하게 만들고 싶었던 세종과 조선 전기 정치가들의 진취적인 기풍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조선 전기에는 중국의 과학 기술은 물론 이슬람 심지어 동로마 제국의 과학 기술까지 소개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앙부일구  자격루도 송나라 때 연숙, 심괄 등이 만든 물시계를 참고했고, 시보장치는 이슬람의 기술을 따왔습니다. 해시계는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천재 발명가 곽수경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슬람 지역을 정벌하면서 이슬람의 높은 과학 기술이 원나라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학 기술이 조선 전기에 활발히...

[인물]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군주,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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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1397년-1450년)은 조선을 넘어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 군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함께 한국사에서 '대왕' 칭호를 가진 인물로, 조선이라는 국가의 엄청난 발전을 이끈 임금이자, 한국사에 길이 남을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조선 4대왕으로,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재위하였습니다. 세종대왕 표준영정 세종의 즉위과정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킨 일련의 행동과 사건들로 인해 태종의 마음이 동요하였습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안정과 왕권을 이어받아 훌륭한 정치를 펴기에 양녕대군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태종의 마음이 이미 떠난 것을 알게 된 신하들은 그를 폐위할 것을 청하는 소를 올려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태종에게는 왕후 민씨 소생으로 양녕, 효령, 충녕 등 세 대군이 있었고, 양녕대군에게도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를 폐하고 새로이 세자를 세우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에 세자 폐립에 관해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종의 마음은 이미 셋째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1418년 6월에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라고 하며 세자로 책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처럼 충녕대군에 대한 세자책봉은 태종의 뜻에 따라 극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대부분의 신하들도 이를 환영하였습니다. 두 달 뒤인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선위를 이어받아 세자 충녕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가 바로 세종입니다. 세종의 국가경영  세종은 아버지 태종과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고려의 마지막 충절 정몽주, 조선의 건국자 정도전을 제거했습니다. 또 이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을 도왔던 처남 민무구, 민무질을 비롯한 여러 공신들도 가차 없이 제거하...

보이저 2호의 항해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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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째 날아가는 ‘인류의 우주 대사’… 보이저 2호, 여전히 항해 중  1977년 8월 20일, 미국 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내버럴. 하나의 탐사선이 태양계를 벗어나 우주의 끝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보이저 2호(Voyager 2). 발사 47년이 지난 지금도 이 우주선은 어둠의 성간 공간에서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항해 중입니다. 보이저 2호 이미지 외행성 4곳 최초 일괄 탐사… ‘위대한 항해’의 서막  보이저 2호는 NASA가 기획한 ‘행성 대탐사’ 프로젝트의 핵심 탐사선으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네 개의 거대 외행성을 모두 탐사한 유일한 우주선입니다. 당시 NASA는 외행성들의 일렬 배열이라는 수세기 만의 천문학적 기회를 이용해, 일명 ‘그랜드 투어’ 궤도를 통해 이들 행성을 연쇄적으로 방문하는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 결과, 보이저 2호는 1979년 목성, 1981년 토성, 1986년 천왕성, 1989년 해왕성을 차례로 탐사하며 각 행성의 고리, 위성, 자기장 등을 생생하게 포착해 전송했습니다. 그 가운데 천왕성과 해왕성은 지금까지도 보이저 2호가 유일하게 접근한 인류의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보이저 1호와 보이저 2호의 위치 성간 공간 진입, 지구와의 거리 208억 km  보이저 2호는 본래 외행성 탐사를 목적으로 설계됐지만, 임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2018년 11월 5일, 보이저 2호는 태양풍이 미치지 않는 태양권계면(Heliopause)을 지나며 성간 공간(Interstellar Space)에 진입했습니다. 이는 2012년 보이저 1호에 이은 두 번째 사례입니다.  현재 보이저 2호는 지구로부터 약 139.3 AU(약 208억 km) 떨어진 성간 공간에서 초당 15.3km(시속 약 55,000km) 속도로 이동 중입니다. NASA는 이 탐사선이 앞으로 수만 년간 은하를 떠돌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장비 하나씩 꺼져도… 마지막 신호까지 보내는 집념 ...

[인물] 후백제를 세운 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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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훤(甄萱, 867년 ~ 936년)은 신라 말기의 군인이자 후백제의 초대 국왕입니다. 892년에서 935년 음력 3월까지 후백제의 왕으로 재위한 그는 본래 통일신라의 장군이었으나 8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892년에 통일신라의 무진주를 습격하였으며, 900년에 통일신라의 완산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건국하게 됩니다.  927년 서라벌로 쳐들어가 붙잡은 신라의 경애왕을 스스로 자진하도록 하고 경순왕을 신라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935년 음력 3월에 아들인 신검이 일으킨 정변으로 축출되었다가 그 해 6월에 고려 측과 사위 박영규 등의 도움으로 후백제를 탈출하였습니다. 대리청정을 하던 신검은 같은 해 음력 10월 17일에 정식으로 즉위하였지만, 936년 음력 9월에 견훤을 앞세운 왕건 측의 총공격으로 후백제는 멸망하였습니다.  신검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왕건의 후백제 정벌에 앞장섰던 견훤은 신검이 왕건에 의해 일단 사면되는 조치를 받자 극도의 울분과 번민으로 등창이 일어나 크게 번졌고, 이에 며칠 후에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후백제 견훤 견훤의 생애  견훤은 경상북도 상주 출신으로 그 아버지는 아자개였습니다. 견훤은 하급 군인 출신으로 출정하는 곳에서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습니다.  그는 오늘날 전라도 일대에 나라를 세우는데 즉위 직후 교서에서 이미 후백제 창건의 당위성을 설파하였습니다. 삼한 중 마한이 으뜸이고 마한을 계승한 것이 백제인데, 신라에 의해 백제가 망했기 때문에 다시 백제를 세우겠다는 주장입니다.  영토로 보면 후백제가 후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작아 보이지만 어떤 지역보다 평야와 인구가 많아서 왕건보다 병사가 두 배나 많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후삼국 시대에 가장 강성했던 나라로 통상 후백제를 꼽기도 합니다. 견훤의 묘 후고구려, 신라와의 전투  무장 출신 견훤은 시종일관 전투를 통해 승부하려고 하였습니다. 궁예에 이어 왕건과 18년간 치열한 접전을 펼쳤고 팔공산 전...

[인물]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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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弓裔, 869년? ~ 918년)는 신라 시대 왕가 진골귀족 출신의 승려이자 태봉[후고구려에서 마진, 태봉으로 국호가 바뀜]의 군주입니다. 그는 신라 헌안왕 또는 경문왕과 후궁 사이에 태어난 서자였습니다. 속세에서의 성은 김(金)씨, 본관은 경주(慶州),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선종(善宗)입니다. 918년 왕건에게 축출되었습니다.  신라 왕실의 서자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유모가 피신시켜 죽음을 모면했고 이후 세달사로 피신하여 승려가 되었습니다.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자립하여 사병을 모으고 장군이 되었다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했습니다. 뒤에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변경했으나 스스로를 미륵으로 자처하면서 신정적 전제 왕권을 강력히 추진하였습니다.  이후 호족들과 태봉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군인, 불교 세력 및 유학자들과 갈등하던 중 918년 시중 왕건과 그를 추대한 군인, 왕건을 강력히 지지한 옛 고구려계의 패서 지역 호족들과 왕건을 지지한 유학자들에게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궁예 표준영정 후고구려를 건국하다  후삼국 시대에 후고구려를 건국한 왕. 정확한 출생 경위는 모르지만 신라 진골귀족의 후예라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신라 말기 진성여왕 때가 되면 지방 반란이 본격화됩니다. 죽주의 기획, 북원의 양길 등이 등장하는데 승려였던 궁예는 이들의 수하에 들어가서 강릉 일대에서 세를 도모하였습니다. 이후 철원, 개성 등으로 영역을 확대했고 결국 양길 세력을 물리친 후 후고구려를 세웠습니다.  궁예는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자주 바꾼 것으로 유명합니다. 국호를 901년에 후고구려, 904년에는 마진, 911년에는 태봉으로 바꿨고 수도도 송악(오늘날 개성)에서 철원으로 옮겼습니다. 불안정한 정국 운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데 다만 국호의 의미만큼은 곱씹어볼 만합니다. 마진은 대동방국이라는 의미이고, 태봉은 서로 화합하는 세상이라는 의미인데 고구려를 계승하고 백제와 신라를 포괄하는...

[인물] 고려의 태조, 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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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王建, 877–943) 고려의 초대 임금, 태조 왕건은 877년 음력 1월 14일(양력 2월 4일) 송악(지금의 개성)에서 태어났습니다. 발해계 호족의 외가와 고구려 계통의 가문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인망이 두터웠으며 풍수지리 전문가 도선(道詵)의 예언에 따라 태어난 인물로 전해집니다. 왕건 표준영정 궁예 휘하에서의 성장 896년 송악의 호족 왕륭과 왕건은 궁예에게 귀부했고, 왕건은 장군으로 활약하며 충주·청주·상주를 비롯해 육지와 해상을 오가며 후백제의 거점 나주를 여러 차례 공략했습니다. 해상전에서 화공 전략으로 승리를 거두며 도서 지대에도 영향력을 뻗혔고, 913년에는 시중(侍中)이 되어 정치∙군사적 2인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권력 장악과 건국 918년 궁예의 폭정을 이유로 신숭겸 등 무장과 귀족의 지지를 받은 왕건은 철원에서 반란을 일으켜 궁예를 축출하였습니다. 7월 30일 고려를 세운 뒤 수도를 송악으로 옮겼습니다. 호족 통합을 위해 정략결혼, 자제 유학, 식읍과 사심관 제도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공산전투에서 왕건과 신숭겸 후삼국 통일 전쟁 왕건은 신라와 우호관계를 구축해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자 지원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927년 공산 동수 전투에서는 패하고, 신숭겸 등이 전사하였습니다. 이후 930년 고창 병산 전투에서 유금필 등의 활약으로 후백제를 크게 격파하며 주도권을 회복하게 됩니다. 935년 견훤이 고려에 투항하고, 신라 경순왕도 사위로 맞이하며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통치 정책 * 호족 융합 : 각지 유력 가문과의 결혼 정책, 자제 도성 유학 수용, 사병 통제 등으로 권력 기반을 강화하였습니다. * 북진 정책 : 전진 기지인 서경 개척, 발해 유민 수용, 여진족·거란 견제 외교를 적극 추진하였습니다. * 숭불정책 : 왕사 임명(충담), 무차대회 개최, 사원 중수·건립 등을 통해 불교를 국가 기반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외교와 말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왕건은 강경 대응으로 사신을...

인간의 신체는 우주에서 폭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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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사람이 우주복 없이 우주 공간을 떠다닌다면 어떨까요? 사람의 몸이 폭발할까요? 눈알이 튀어나오고, 즉시 죽게 될 것까요? 이는 종종 공상과학 소설에서 다뤄지는 주제이기도 한데요, 실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의 신체가 우주 공간에 노출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지만 즉각적으로 치명적인 것은 아닙니다. 진공상태에 노출된다면?  만약 우주선 밖으로 우주복을 입지 않고 나갔다면, 사람의 신체는 여러 가지 극한 도전을 맞게 될 것입니다. 우선 숨을 쉬게 해주는 산소가 극도로 부족합니다. 우주에도 물론 산소가 존재하긴 하지만 너무나도 희박해서 1m² 내에서 한 개의 산소 원자를 찾는 것조차 힘듭니다. 주변이 거의 진공 상태이기 때문에 폐로 들이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주 유영을 하는 우주비행사, 브루스 매캔들리스 온도와 기압의 극한 환경  우주는 그늘에 있을 때 매우 추운 공간입니다. 절대 0도인 -273℃에서 고작 몇 ℃ 더 높을 뿐입니다. 그리고 열을 대류하거나 전도할 수 있는 매개체가 없습니다. 결국 몸 안의 모든 열이 복사로 빠져나가면서 동사할 것이지만 즉각적으로 발생하지는 않습니다.  가장 커다란 문제는 압력의 부재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신체는 주변 환경과 밸런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는 압력이 존재하지 않고 진공상태입니다. 여러분 신체 외부의 압력은 0기압인 반면, 신체 내부는 정상 기압(1기압) 상태입니다.  이와 같은 급격한 기압의 차이는 말 그대도 여러분의 숨을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폐에 있는 공기는 여러분이 재채기하는 것보다 빠르게 빠져나갈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숨을 참으려고 한다면, 아마도 몸이 급격하게 팽창하면서 신체 조직들이 찢겨 나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숨을 참으면 안 됩니다. 또한 변도 밖으로 배출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여러분은 배변 냄새를 맡지 못할 것입니다. 체액의 증발  여러분의 피부 주변에 액체들은...

우주에서 죽음을 맞이한 우주비행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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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매우 척박한 환경입니다. 우주에는 공기가 없고 온도도 약 260℃에서 최저-100℃까지 변화가 심합니다. 또한 언제나 충돌의 위험이 있죠. 일반적으로 천체의 공전 속도가 28,000km/h 에 달하기 때문에 작은 금속 조각일지라도 부딪히면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갑자기 압력이 떨어진다거나 혹은 산소 공급이 잘못되면 더 큰 위험이 발생합니다. 만약 화재가 발생하면 밖으로 도망치거나 창문을 열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많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우주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사고는 우주선이 발사되거나 지구로 재진입하던 중에 발생했습니다. 이 중에서도 1986년 1월 28일 발생했던 우주 왕복선 챌린저 호 사고가 아마도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챌린저호에 탑승한 우주비행사들 우주왕복선 챌린저 호 사고 당시 부스터 로켓의 연료가 새면서 주연료 탱크가 파열되었고 결국 우주 왕복선 본체가 발사 73초 만에 부서지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참극은 불과 15km 상공에서 발생했습니다. 당시 사고 보고서를 보면, 비행사 조종실이 초기 폭발에서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조종실은 불덩어리가 되어 밖으로 튕겨져 나갔고, 탄도 궤도를 그리며 약 20km 상공까지 올라갔다가 바다에 떨어졌습니다. 비행 조종사들은 폭발에서는 살아남았지만 수면과 충돌하면서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잔해가 너무 엉망이 되어서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몇몇 비행사들은 자유낙하 중에 여전히 의식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우주가 아니라 해수면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우주왕복선 콜럼비아 호 사고 NASA는 2003년 2월 1일에 두 번째로 우주 왕복선을 잃었습니다. 당시 지구로 재진입 중이던 콜럼비아호에서 사고가 발생하였는데요. 이번에도 참극은 우주가 아니라 지구의 대기에서 발생했습니다. 이 왕복선의 경우 뜨거운 공기가 비행기의 날개 앞 가장자리의 구멍에 들어가면서 균열이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빠르게 선실 내의 기압을 줄임으...

[인물] 유교적 개혁정치, 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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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광조(1482년~1519년)는 조선 전기 중종 때 문신으로, 유교적 개혁 정치를 실천하다 처형당했습니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고, 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였는데 연산군의 무오사화 당시 유배 중이었습니다. 용감하게도 조광조는 유배 중인 김굉필을 찾아가서 사사[스승으로 삼아 가르침을 받음]받았습니다.  조광조(趙光祖)의 자는 효직(孝直)이고, 스스로 호를 정암(靜菴)이라 하였습니다. 그는 김굉필의 제자로서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이었으며,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 때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현할 적임자로 사림 세력에 의해 추대되었습니다. 중종 10년(1515) 과거 급제 이후 중종에 의해 개혁 정치 추진의 중심인물로 발탁되었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승진을 거듭하면서 개혁 정책의 추진을 주도하게 됩니다. 개혁정치를 펼친 조광조  하지만 사림 세력의 급진적인 개혁 추진은 국왕과 공신 세력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는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조선의 정치는 몇 차례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결국 사림 세력이 주도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조광조는 성리학적 이념에 충실한 개혁정치가이자 조선 도학의 정통으로 추숭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인종 원년(1545)에 관작(官爵)이 회복되었습니다. 중종의 눈에 들다  조광조는 과거에 합격한 후 조정에 들어가자마자 여론을 주도하면서 중종의 눈에 들었습니다. 학문적 탁월함, 정치적 이상의 선명성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표현하며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정치력까지 지녔습니다. 당시 중종은 연산군이 쫓겨난 후 사실상 반강제로 국왕이 됐기 때문에 여러 공신 세력에게 위축된 상황이었습니다.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를 적극 등용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조광조 역시 중종을 통해 유교적 이상 사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조광조 묘소 조광조가 꿈꾸었던 개혁정치  조광조의 노력을 보통 '도학 정치'라고 부르는데,...

[인물] 조선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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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전은 실천적인 개혁가에서 저돌적인 혁명가로 거듭난 고려 말의 정치가입니다. 공민왕은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 이색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하여 고려의 교육 기관 성균관을 개혁하려 했습니다. 이색은 유학 사상의 새로운 조류인 성리학을 가르치며 100여 명의 인재를 길러냈습니다. 이들을 신진 사대부라 하는데, 고려의 마지막 충절이라고 여겨지는 정몽주와 고려 왕조를 멸망시킨 정도전(1342년 -1398년)이 모두 이 부류였습니다.  정도전은 공민왕 9년에 과거에 합격한 후 성균관박사, 태상박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쳤습니다. 당시 원나라가 중국에서 밀려난 후 몽골 지역에서 북원이 되고, 한족이 세운 명나라가 들어서는 등 동북아 국제 질서의 혼란기였습니다. 이 와중에 이인임 등의 권문세족은 북원과의 관계를 복원하고 싶어했고, 정도전은 친명파의 입장을 견지하다 격심한 갈등 끝에 결국 유배를 가게 됩니다. 나주에서의 유배 생활 후 고향에서 야인 생활을 하는데, 많은 학자가 이때 정도전이 진정으로 일반 민중의 삶을 체험하며 혁명파로 거듭났다고 추정합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개경 출입은 금지됐고 수차례 인재 양성을 시도하지만 이 또한 실패합니다. 결국 좌절의 연속 끝에 1383년 이성계를 찾아갔고 그와 평생의 우의를 쌓게 됩니다. 정도전 표준영정  정도전은 다시 9년간의 격렬한 정치 투쟁 끝에 조선 왕조를 세웠고 1398년 이방원에게 암살당하기 전까지 약 6년간 건국 사업에 혼신을 다합니다. <조선경국전>을 집필하여 법에 근거한 통치 문화를 만들었고, <고려국사>를 집필하여 조선 왕조의 역사적 당위성을 밝혔으며, <불씨잡변>을 통해 불교가 아닌 성리학을 통한 국가 운영의 정당성을 설파했습니다.  수도 한양을 설계한 것은 물론 진법을 편찬하여 요동정벌을 추진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무엇보다 재상 중심의 통치를 주장하며 왕이 아닌 과거 시험을 통해 선발된 신하들이 통치하는 나라를 꿈꿨습니다. ...

[인물] 조선의 창업군주,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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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계는 1335년(충숙왕 복위4년) 고려 동북면 화령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고려 장수이며 공민왕과 우왕 시대에 홍건적과 왜구 토벌에서 영웅적 공로를 쌓아 입지를 다졌습니다. 1388년(우왕 14년) 철령 이북 영토 문제를 두고 명나라와 갈등이 빚어지자,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우왕은 명나라 요동 정벌을 명하였습니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요동 정벌을 위하여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공양왕에게서 선위 형식으로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함으로써 조선을 개국하였습니다. 태조 이성계 고려 말기의 명장 이성계  귀신같은 활솜씨와 지휘력으로 홍건적과 왜구를 연달아 막아내 최영과 함께 구국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고려 말 최대 군벌로서 실력을 갖춘 데다가 신흥 무인세력들과 급진 신진사대부들의 협력과 지지를 받으며 정계의 주요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정적들을 차례로 숙청했으며 마침내 1392년에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하게 됩니다.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을 내세워 새 왕조의 기틀을 다졌으나, 계비인 신덕왕후가 죽자 일어난 1차 왕자의 난으로 둘째 아들 정종에게 전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처가 쪽 생존자였던 조사의를 내세워 1402년 함경도에서 군을 일으켜 권토중래를 노렸지만 태종에게 진압되었습니다. 1408년 승하하여 건원릉에 안장되는 한편 신위는 종묘에 봉안되었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이성계의 생애  조선의 창업 군주인 이성계는 함경도 출신으로 5천 명의 사병을 거느렸던 지방의 실력자이자 활쏘기가 출중했던 탁월한 무장이었습니다.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은 국가 운영에 근본적인 위험이 되었습니다. 10만 명이 넘는 대규모 부대인 홍건적이 두 차례 침입했는데 한때는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복주(오늘날 안동)로 피난갈 정도의 거대한 위협이었습니다. 왜구는 해안가에서 내륙까지 침탈을 일삼았고 수백 척의 군선을 몰고 와 직접 개경을 공격할 정도였는데 특히 우왕 ...

[인물]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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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천문학자, 수학자, 음악학자입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함께 과학혁명의 선구자이자 천체역학의 창시자로 불립니다. 주요 업적으로는 행성 운동을 표현하는 케플러의 법칙이 있습니다. 미국 성공회에서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와 함께 성인으로 추대받고 있기도 합니다. 천문학자 케플러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년~1630년) 생전에 그의 조국 독일은 지속적인 종교적 폭력과 사회적·정치적 혼란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케플러는 궁정 쿠데타, 농민 봉기, 심지어 자신의 가족을 겨냥한 마녀사냥까지 견뎌냈습니다. 이런 힘든 배경 에도 그는 행성들이 천체에서 움직이는 방법을 현대 과학으로 이해해냈습니다.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케플러는 마녀 혐의를 받은 어머니 카타리나를 변호하기 위해 1615년에서 1620년 사이에 뷔르템베르크를 여러 번 방문해야 했습니다. 카타리나는 '마녀의 통제력'으로 열두 살 소녀를 마비시킨 혐의를 받고 수감되어 고문을 당했지만, 커플러가 뷔르템베르크 공작의 배후를 조정한 후 풀려나 운 좋게 처형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케플러의 증조할머니를 포함해 수십만 명의 유럽 여성이 17세기 초에 유럽 중부를 휩쓴 마녀사냥으로 화형당했습니다. 케플러의 생애  케플러는 슈바빙이라는 독일 남서부 지방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를 버린 ‘부도덕하고, 거칠며, 싸움을 일삼는 병사’였습니다. 그래서 케플러는 어린 시절 조부모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원래 그는 개신교 목사가 되려고 열세 살에 신학교에 입학했고 1591년에 신학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594년 그라츠에 정착해 수학 교수가 되었고, 그로부터 3년 후에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1600년에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길 거절하면서 대학교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같은 해에 프라하로 피신한 그는 덴마크 천문학자인 튀코 브라헤를 소개받았습니다. 케플러와 마찬가지로 얼마 전 프라하로...